▲ 금융노조 기업은행지부

이달 11일 초여름 더위가 성큼 다가온 날이었다. 오후 3시30분이 조금 넘은 시각 서울 중구 을지로 KEB하나은행 본점 8층 회의실에 투쟁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5명 정도였다. 이 중 3분의 1은 금융노조 간부, 나머지는 노조 KEB하나은행지부 간부였다. 각각의 손에는 A3 용지 하나씩이 들려 있었다.

큼지막한 표에 '○' '△' '×' 기호가 흰색 용지 안에 가득했다. 노조 노동조건감찰단이 이날 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와 체결한 산별협약이 실제 이행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현장 활동을 시작했다.

"훌륭한 산별협약 있으면 뭐하나…"

감찰단은 지난달 27일부터 4박5일간 러시아 연해주에서 집합교육을 했다. 연해주는 일제 강점기 임시정부격인 대한국민의회를 품은 땅이다. 정덕봉 노조 부위원장이 감찰단 총괄팀장으로 일한다. 정덕봉 총괄팀장은 A3 용지를 펼치며 말했다.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단원들과 연해주 집합교육을 다녀왔습니다. 감찰단 활동을 독립운동 정신에 입각해서 해 나갈 생각입니다.”

A3 용지 맨 위에는 ‘총 33개 점검항목, 점검 결과’라는 제목이 달렸다. 노조는 올해 3월11일 열린 지부대표자 워크숍에서 감찰단 운영계획을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사용자측이 아이디어(?)를 제공한 셈이 됐다. 노조는 지난해 산별중앙교섭에서 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에 노사 동수로 구성하도록 돼 있는 성희롱 방지 전담기구 설치와 관련한 내용을 구체화하자고 요구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성희롱 방지 전담기구를 설치한 곳도 거의 없는데 내용 보강을 왜 하느냐”는 핀잔이 돌아왔다.

산별협약 불이행 사실을 사측이 자인한 것이다. 여기에 금융권 노사가 지난해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상한제 시행을 앞두고 노동시간단축과 과당경쟁 방지를 위한 선 굵은 합의를 한 것도 배경으로 작용했다.

정덕봉 총괄팀장은 “지난해 교섭 과정을 거치면서 아무리 훌륭한 산별협약을 체결해도 현장에서 지켜지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산별협약이 각 사업장에서 이행되는지 여부를 점검하고 미이행시 사측을 압박하기 위해 감찰단을 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33개 항목 중 '동그라미' 10개에 불과

같은달 13일부터 25일까지 감찰단원 모집이 시작됐다. 30개 사업장에서 44명이 감찰단원으로 참여한다. 유주선 노조 사무총장이 감찰단장으로 활동한다. 곧바로 무엇을 감찰할지를 두고 논의가 이어졌다. 감찰단 간사를 맡은 윤여림 노조 정책1본부 노동정책실장과 김남수 노조 여성본부 부장이 점검표를 작성했다. 점검표는 크게 △노동시간단축 △감정노동 보호·성평등 실현 △과당경쟁 방지 등 세 갈래로 구성됐다.

점심 휴게시간 1시간 피시오프(PC-OFF) 제도 실시와 임신기간 2시간 근로시간단축, 핵심성과지표(KPI) 평가항목 축소 및 단순화, 미스터리쇼핑(창구모니터링) 미실시 등 33개 세부항목으로 짜여 있다. 윤여림 간사는 “기존 산별교섭을 통한 합의사항에 기반을 두고 점검표를 적성했다”며 “이후 감찰단원에게 점검표를 배부해 지부별로 산별합의 이행 여부를 점검했다”고 설명했다. 감찰단은 항목별로 협약을 이행하면 '○' 표시를, 이행되지 않으면 '×' 표시를 하도록 했다. 미흡하거나 이행을 준비하는 항목에는 '△' 표시를 했다. 27개 지부가 점검에 참여했다. 감찰단은 이 중 3분의 2 이상 조직이 협약을 이행하고 있다고 밝힌 항목을 '○'로 분류했다. 이행률이 3분의 1 이하면 '×', 나머지는 '△'로 구분했다. 33개 항목 중 '○'와 '×'는 각각 10개, '△'는 13개로 집계됐다. 유주선 감찰단장은 "지부별 산별협약 이행 여부를 점검한 결과 전체적으로 미흡한 것으로 조사됐다"며 "현장점검과 사측에 경고를 보내는 활동을 병행해 이행률을 제고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이행시 법적 조치 예고에 사용자들 "과하다"

“전반적으로 잘 지켜지고 있습니다. 다만 지난해 성희롱 발생시 피해자에게 유급휴가를 부여하는 내용의 산별협약이 체결됐는데요. KEB하나은행은 시행이 안 되고 있네요. 다른 은행 대다수가 시행하고 있는 제도인 만큼 지부가 이런 점을 얘기해 사측을 강하게 압박하시길 바랍니다.”

정덕봉 총괄팀장이 점검표를 조목조목 짚어 가며 설명했다. 현장 간부의 질문이 이어졌다. 최영애 KEB하나은행지부 부위원장은 “주 52시간제 편법운영 사례가 다수 발견돼 사측에 불법을 감시하는 체계를 구축하자고 제안하고 CCTV 열람권을 부여하라고 요구했지만 개인정보 보호법 등 법적인 문제가 검토되지 못해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 총괄팀장은 "감찰단이 암행어사처럼 활동하는 곳이 있다"며 다른 지부 사례를 언급했다. 노조가 감찰단을 꾸린 것은 KB국민은행지부 활동에서 영향을 받았다. KB국민은행지부는 6년 전부터 자체적으로 근로조건감찰단을 꾸려 운영하고 있다. 노조 35개 지부 중 유일하다. 상임간부 2명이 감찰단장으로 활동한다. 주요 활동은 근로조건 저하 혹은 부당노동행위가 있었는지 여부를 조사하는 일이다. 주기적으로 현장을 순방한다. 조합원들의 제보가 있으면 불시에 현장을 점검하기도 한다.

지부 감찰단에는 매월 본부나 영업점별 시간외근무 등록현황과 PC-ON·OFF 자료가 제공된다. 현장 점검시 CCTV를 비롯한 지점별 상황일보·당번일지 등을 열람한다. 지부와 회사가 체결한 "사용자는 조합의 요청이 있을 경우 문서·자료·간행물 등 제반자료를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제공한다"는 단체협약 조항이 근거가 됐다. 지난해 가을 감찰단은 부산지역 한 조합원에게 지점장이 직원을 상대로 수시로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다는 제보를 받았다. 감찰단은 현장 점검을 통해 증거를 확보했고 해당 지점장 직위해제로 이어졌다.

신경철 KB국민은행지부 감찰단장은 “조합원들이 인사고과 등을 이유로 상급자에게 부당한 일을 당해도 참고 있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며 “감찰단이 조합원 신변을 안전하게 보호해 가며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은행을 통해 후선배치하거나 경고를 주도록 하니 관리자들이 이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전했다.

조합원 면담·인사부 항의방문 현장활동 강화

감찰단의 현장 방문은 첫날 씨티은행지부와 KEB하나은행지부를 시작으로 전북은행지부·NH농협지부·우리은행지부·산업은행지부로 이어졌다. 이달 18일 오후에는 서울 을지로 IBK기업은행 본점에 있는 기업은행지부를 찾았다. 감찰단 요청으로 양충근 기업은행 인사담당 부행장과 간담회가 이뤄졌다. 감찰단은 양충근 부행장에게 점검표를 건넸다.

기업은행은 33개의 점검항목 중 23개를 이행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점검 대상 27개 지부 중 1위다. 정덕봉 총괄팀장은 “기업은행이 산별협약을 모범적으로 이행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지만, 이를 선도하는 차원에서 더욱 분발해 달라”고 당부했다.

양충근 부행장은 “육아휴직을 2년에서 3년으로 확대한 것도, 전체 직원들에게 넥타이를 풀게 한 것도 앞장서고 있다”며 “주 52시간제도 시스템적으로 조금의 애로사항은 있겠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기업은행지부 간부와의 만남이 이어졌다. 노동시간단축을 핵심으로 하는 산별협약이 제대로 이행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인력채용이 필요하다는 제안이 나왔다.

이태용 기업은행지부 정책국장은 “기업은행이 생산성 1위인데 달리 말하면 노동강도가 세고 인력이 부족하다는 뜻”이라며 “기업은행이 금융위원회의 인력통제를 받는 기관인 만큼 노조가 금융위와 정치권에 인력충원 필요성을 알려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정덕봉 총괄팀장은 “감찰단 운영의 취지가 바로 그것”이라며 “산별 노사의 소중한 합의로 노동시간을 제대로 측정하고, 업무관행을 개선하며, 근무시간을 줄이고 그래도 안 되면 인력충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고 압박할 것”이라고 답했다.

감찰단은 이날 사용자들에게 사업장별 점검표를 공문과 함께 발송했다. 이달 30일까지 감찰단이 점검한 사항을 확인한 뒤 미이행으로 판명될 경우 이를 시정하라는 내용이었다. 합당한 이유 없이 시정하지 않을 경우 법적 조치에 나서겠다고 예고했다.

사용자협의회 관계자는 “일부 점검항목은 별도기구 논의사항이며 노력 조항인 것도 있는데 이를 당장 이행하지 않았다고 법적인 조치를 한다는 것은 과한 측면이 있다”며 “사용자 동의 없이 현장을 찾는 것에 문제점이 없는지를 살펴볼 것”이라고 밝혔다. 감찰단은 향후 현장활동을 강화한다. 지부 간부가 아닌 조합원들이 실제 일하고 있는 노동현장을 찾는 활동을 강화한다. 다음달 1일 SC제일은행지부 요청에 따라 서울 지역의 한 영업센터를 찾을 예정이다. 야근이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감찰단은 산별협약 이행률이 저조한 사업장을 중심으로 인사부서를 항의방문하는 계획도 수립 중이다. 고용노동부에 특별근로감독도 신청한다. 정덕봉 총괄팀장은 “감찰단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 가자는 취지에서 최근 앞에 '1기'라는 말을 붙였다"며 "노조 규약에 명시하는 방안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조건감찰단장을 이끌고 있는 유주선 금융노조 사무총장은 금융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과 실적 압박에 노출돼 있다고 진단했다. 감찰단은 7월 말까지 현장방문 활동을 하면서 조합원들을 만나 해법을 찾는다. 지난 20일 오후 서울 다동 금융노조 사무실에서 유주선(52·사진) 감찰단장을 만나 소회와 목표를 들었다.

- 감찰단 설립 배경과 취지가 궁금하다.

“2001년 이후 국내 은행들이 일제히 금융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며 성과중심의 인사·평가체계를 강화했다. 은행 간 경쟁이 심화됐다. 이 과정에서 금융의 공공성은 약화됐고, 불완전 판매 등 금융소비자 피해가 증가했다. 금융권 노동자들 또한 장시간 노동과 실적압박으로 건설업 다음으로 많은 산업재해 사망이 속출했다. 과당경쟁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금융노조는 지난해 산별교섭에서 의미 있는 합의를 했다. 현장에서 이러한 합의가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 점검하고 실질적인 개선을 이루기 위해 감찰단을 구성해 활동하고 있다.”

- 6월에 지부를 순방했는데.

“은행 간 편차는 있지만 아직도 현장의 상당수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상시적인 실적달성 캠페인으로 많은 직원들이 고통받고 있다. 경영진은 주주로부터, 직원들은 경영진으로부터 성과를 요구받는 구조다. 치열한 금융회사 간 경쟁이 더해져 노동조건 개선이 제대로 이뤄지기 어려운 상황이다.”

- 감찰단 활동에 사용자들의 반응은 어떤가.

"활동이 과하다는 불만이 많다. 노조는 금융권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확보해야 한다. 지나친 경쟁으로 인한 심각한 수준의 노동조건 악화를 더 이상 방치할 수도 없다.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사용자측도 책임을 인정하고 결단해야 한다."

- 향후 활동 계획은.

"26일 2차 감찰단 회의가 예정돼 있다. 5월 점검 결과 산별협약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에 차기 회의에서는 협약 이행을 담보할 수 있는 세부 활동계획을 수립할 예정이다. 7월 말까지 현장방문 활동을 지속하면서 조합원 간담회와 사용자 면담을 하고 현장을 바꾸는 활동을 해 나가겠다. 추가 현장점검 결과를 토대로 강력하게 대응할 계획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장에서는 수많은 금융노동자들이 과도한 경쟁이라는 굴레 속에서 희생당하고 있다. 금융권 조합원들의 아픔을 더 이상 방치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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