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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위의 산책, 테카포 호수와 캔터베리 천문대
▲ 최재훈 여행작가

뉴질랜드 남섬에는 빙하가 깎이고 녹으면서 만들어진 호수가 곳곳에 있다. 빙하가 만든 호수들은 물 색깔이 보통의 호수와는 다르게 잿빛으로 푸른데, 이런 색을 밀키블루라고 부른다. 남섬을 대표하는 호수 테카포도 그런 밀키블루한 호수 중 하나다. 남섬을 여행하는 이들이라면 자유여행객이든, 패키지여행객이든, 버스를 타고 움직이건, 캠핑카를 타고 돌아다니건 십중팔구는 이곳을 지나가게 된다. 남섬에서 가장 큰 푸카키 호수와 함께 크라이스트처치에서 퀸스타운으로 가는 중간 길목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여행자들이 낮에 한두 시간 들러 호숫가에 있는 ‘선한 양치기 교회’ 주변을 돌아보며 호숫가 언덕배기의 조그만 교회와 근처의 양치기 개 동상에서 인증샷을 찍고 바쁘게 지나간다. 하지만 테카포 호수의 진면목은 해가 떨어진 뒤에 보이기 시작한다. 테카포 호수 주변이 뉴질랜드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별과 은하수를 보기에 정말 좋은 장소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세계 몇 대 별 보기 최적 장소 어쩌고 하는 이름을 누가 갖다 붙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구글 지도에 딸려서 나오는 테카포 은하수 사진들은 그런 얘기들이 ‘뻥 카드’는 아닐 거라는 믿음을 가지게 만든다. 테카포 호수에서 차로 10분쯤 가면 산꼭대기에 캔터베리대학 천문대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별 보기 투어의 성지 같은 곳이다. 첫 두 번의 뉴질랜드 여행에서는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쳐 버렸다. 그래서 이번에는 꼭 남반구의 은하수를 보리라 작정했다. 하지만 작정한다고 해서 술술 풀리는 그런 일은 없는 게 여행이다. 여행 떠나기 직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뉴질랜드의 달뜨는 주기를 보니 하필 테카포 호수에 갈 즈음이 딱 ‘보름’이었다. 별 보기가 좋은 곳이라면 당연히 달 보기도 좋은 곳일 터, 이번 여행에서는 은하수 대신 호수 위에 둥실 뜬 보름달 구경이나 실컷 하게 되겠다고 생각하며 짐을 싸야 했다.

예상대로 테카포 호수의 밤은 밝았다. 밝아도 너무 밝았다. 달이라고 하기에는 태양처럼 쳐다보기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달빛을 뚫고서도 제법 많은 별들이 하늘을 채우고 있었지만, 은하수는 무리였다. ‘그래, 이번에는 달구경이나 실컷 하자. 원래 그렇게 생각하고 왔잖아’ 하고 스스로를 달래 보지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다음날 아침, 천문대 옆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이라도 해야 별을 못 본 아쉬움이 달래질 것 같아서 잠에서 덜 깬 일행들을 꾀었다. 큰길 옆으로 빠져 조금 달렸더니 천문대로 들어가는 입구가 금세 나타났다.

“팔딸라!”

엥? 입장료가 있었어? 별을 보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남는 시간에 살짝 들러나 보려고 왔는데 8달러나 내고 들어가야 한다는 소리에 입가가 뾰로통해진다. 하지만 일행들을 꾀어 온 터라 되돌아 갈 수는 없는 일. 입구를 통과한 캠핑카가 정상으로 이어지는 오르막을 빌빌거리면서 힘겹게 달린다. 그런데 웬걸! 산 전체가 안개로 자욱하다. 이거 뭐 올라가도 안개밖에 볼 게 없겠네. 8달러는 이대로 날리는 건가? 하며 투덜거리면서 안개 속을 헤매던 바로 그때. 안개가 순식간에 걷히더니 푸른 하늘과 산꼭대기 천문대가 눈에 들어온다. 조금 더 올라 옆을 보니, 안개라고 생각했던 녀석들이 안개가 아니라 구름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구름 위에서 차를 몰고 있는 거다. 해발고도라고 해 봐야 몇백 미터 남짓밖에 되지 않을 언덕 같은 산에서 구름 위로 올라서다니. 어리둥절한 상황.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밖으로 나와 사방팔방이 트인 주변을 돌아보면서 아~ 하는 탄식을 흘리고 말았다. 너나 할 것 없이 연신 탄성을 뱉어 내며 각자의 휴대전화와 카메라를 두 손에 꼭 잡고 잡히지 않는 장관을 사진에 담아 보겠다고 안간힘들이다. 내가 서 있는 이 산꼭대기 하나만 남겨둔 채, 세상은 온통 구름바다였다. 주차장에서 출발해 산봉우리를 한 바퀴 도는 산책길. 나는 지금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산책길을 걷고 있다. 구름 위를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8달러에 구름 위를 걷는 행운을 얻다니. 한 시간 정도 구름 위 산책이 끝날 즈음. 발아래에 뭉실거리던 구름들이 슬글슬금 벗겨지기 시작하더니 그 사이사이로 주변의 초원과 호수들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아~ 저 아래에 저런 세상이 있었구나. 그제서야 안드로메다쯤에 보내 뒀던 현실감이 살짝 돌아온다. 이제 신선계에서 나와 인간계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여행이 그렇다. 기대를 잔뜩 한 채 몸에 힘주고 간 곳은 에이~ 겨우 이 정도야 하고 돌아서 나오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이렇게 아무런 기대도 없이 들른 곳에서 천하를 얻은 것 같은 눈 호강, 마음 호강을 하는 경우도 있다. 사는 일도 그렇지 않나? 잔뜩 힘준 일은 허망하게 끝나기 일쑤고, 마음 비우고 다가간 일에서 생각지도 못한 성공을 맛보는. 여행과 인생은 이렇게 가끔씩 서로 맞닿기도 한다.

여행작가 (ecocjh@naver.com)

최재훈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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