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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권취소 용기를 품을 수 있는 근로복지공단을 고대하며박다혜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
▲ 박다혜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

삼성반도체를 비롯한 전자산업 종사자들의 뇌종양 발병을 업무상재해로 판단하는 사례들이 근로복지공단과 법원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은 2017년쯤이다. 반올림과 재해당사자들의 문제제기가 수년간 이어지면서, 작업환경에 대한 연구와 질병의 직업적 원인에 대한 의학적 연구가 축적돼 만들어진 결론이었다. 그 투쟁의 맨 앞에 섰던 당사자가 삼성전자 기흥공장 LCD사업부에서 오퍼레이터로 근무한 후 2005년 뇌종양이 발병한 한혜경님이다. 그러나 한혜경님의 2009년 산재신청은 2010년 불승인됐고(원처분) 이어진 심사청구, 재심사청구도 모두 기각됐으며 행정소송을 제기했으나 2015년 대법원에서 패소가 확정됐다. 2017년 정부와 법원이 아는 것을 2009년에도 알았더라면, 혹은 한혜경님이 2009년이 아닌 2017년에 산재신청을 했다면 결론이 달라질 것이 사실상 분명해 보였다.

정부와 일부 변호사들은 “법원에서 패소(불승인) 확정판결을 받은 2010년 원처분에 대해서는 기판력이 문제가 되므로 직권취소가 불가하고, 재신청을 한다고 하더라도 불승인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기판력은 소송법적 효력으로, 소송당사자와 법원을 주관적 범위로 삼고 있을 뿐 근로복지공단 같은 행정청을 구속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언급한 것은 단순한 (그러나 중대한) 법리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심지어 법학 교과서에서도 “기판력은 전소의 판결이 갖는 후소의 관할법원에 대한 구속력의 문제이기 때문에 행정행위 직권취소와는 직접 관련성이 없다. 따라서 원고의 청구가 기각되는 경우에 처분청은 직권취소를 할 수도 있다”고 명확히 설명하고 있었다(홍정선, 행정법특강(제14판), 803면, 박영사).

그렇다면 법원이 산재불승인처분취소 소송에서 원고 청구를 기각하는 판결을 했다고 하더라도, 근로복지공단이 원처분(불승인)을 직권으로 취소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할 수 있다. 행정청은 행정행위에 위법 또는 부당한 하자가 있음을 이유로 직권으로 그 효력을 소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직권취소는 행정청 스스로의 반성에 의거해 행정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목적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이 때 소송이 진행 중인지 법원 판결이 존재하는지와 무관하게 행정청은 원처분을 스스로 취소하고 하자를 보완해 다시 적법한 처분을 할 수 있다. 행정행위의 법적합성의 원칙에 비춰 볼 때 위법·부당한 행정행위를 한 처분청에게 이를 시정해 적법성을 회복할 권한을 줘야 한다는 취지다. 대법원도 “행정처분을 한 처분청은 성립에 하자가 있는 경우 이를 취소할 별도의 법적 근거가 없다고 하더라도 직권으로 이를 취소할 수 있다”고 하면서, 직권취소 사유 및 요건을 판단할 때 공익적 필요성에 대한 고려를 해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다(대법원 2002. 5. 28. 선고 2001두9653 판결).

근로복지공단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의해 근로자의 업무상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하고, 재해근로자의 재활 및 사회복귀를 촉진하며 근로자 보호에 이바지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이다(1조와 10조). 이는 헌법상 명시된 국가 책무, 즉 사회보장 증진에 노력하고(34조2항)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할(34조6항) 책무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법원은 최근 판결(대법원 2017. 8. 29. 선고 2015두3867 판결)을 통해 산재보험제도의 목적·기능 및 첨단산업 분야의 안전보건상 특성을 구체적으로 설시한 후 이 제도가 특히 첨단산업 분야에서 화학물질에 의한 직업병으로부터 근로자를 보호해야 하는 현실적·규범적 이유를 강조했다.

국민의 중대한 기본권과 관련한 영역인 산재보험제도에서 원처분 하자를 시정할 두터운 공익적 필요성 등을 고려할 때 위 2010년 원처분 직권취소가 법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정부의 최초 입장은 부당하다. 게다가 정부가 직권취소에 있어 ‘법원 확정판결의 존부’라는 기준을 새롭게 창설하는 것은, 처분청이 위법한 행정행위를 시정해 적법성을 회복하기 위해 부여된 권한을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스스로 저버리는 것이고 동시에 기존 직권취소 사유를 임의로 축소하는 문제가 될 수 있다. 헌법과 법령에서 비롯된 근로복지공단의 역할과 기능을 고려할 때 그 처분의 흠을 시정하는 것은 국민 기본권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사안이므로 직권취소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단순히 행정재량의 문제가 아니라 행정청의 의무라고 볼 여지까지 있었다.

이상의 내용이 한혜경님의 산재 재신청을 앞두고 정부와 주고받은 의견 중 일부다. 이후 근로복지공단은 최초의 ‘논의 불가’ 입장을 철회하고 한혜경님의 재신청을 받아들여 최근 마침내 승인했다. 그러나 직권취소는 끝내 하지 않았다.

의심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노동자 권리를 행사하는 여정에서 행정청의 관행과 통념이 장애가 되는 순간에는, 잠시 멈춰 ‘그들’의 관행과 통념의 근거를 뜯어볼 필요가 있다. 발병 이후 14년이 걸린 한혜경님의 산재인정을 마음 깊이 축하하며, 근거 없는 관행과 통념을 절반만 철회한 ‘그들’에게, 오늘날 법원과 정부가 아는 바에 따르면 충분히 구제받을 수 있는 많은 피해자들이 산재불승인의 과거에 멈춰 있는 현실을 되짚어 봐 달라는 말을 보낸다.

박다혜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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