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중국 난징에서 정정화 가족. 왼쪽부터 남편 김의한, 정정화, 아들 김자동.

6차례 국내에 밀파돼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

국가보훈처에 의하면, 2019년 3월1일 현재 전체 독립운동유공 포상자는 1만5천511명이다. 이 가운데 여성독립운동 유공자는 3%가 채 안되는 432명이다. 정정화는 소수의 여성독립운동가 중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에 속한다. 독립운동의 살아있는 역사라 할 수 있는 회고록(처음 <녹두꽃>으로 펴냈다가 <장강일기>로 재발간)도 펴냈고, 그의 일대기는 연극이나 세미뮤지컬로도 여러 차례 제작, 공연된 바 있고(1998년 <아! 정정화>, 2001년 <치마>, 2005년 <장강일기>, 2019년 <달의 목소리>) 방송에도 여러 차례 소개됐다.

1900년 8월3일 서울에서 태어난 정정화(鄭靖和)의 어릴 적 이름은 정묘희(鄭妙喜). 중국에 있을 때 수당(修堂)이라는 호와 함께 정화(靖和)라는 이름을 써서 본명이 됐다. 11살 되던 1910년 가을 김가진의 3남 김의한과 혼인한 그녀의 삶은 1919년 3·1 운동 후 대동단 총재로 활동하던 시아버지 김가진이 남편 김의한을 데리고 상해로 망명하면서 결정적 전환을 맞이한다. 안창호와 긴밀한 협조 아래 구한국 농상공부 대신을 지낸 김가진이 망명한 사건은 일제에도 큰 충격이었다.

정정화는 1920년 1월 초 시아버지와 남편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상해로 망명한다. 그녀는 서울에서 열차를 타고 신의주를 통해 국경을 건넌 뒤 심양(봉천)·산해관·천진·남경을 거쳐 상해에 도착했다. 그러나 재회의 기쁨도 잠시, 그녀는 또다시 국내로 들어와야 했다. 임시정부 법무총장 신규식과 시아버지 김가진의 지시에 따라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였다.

1차 국내 밀파 때 상해에서 만주 단동(당시는 안동)까지는 이륭양행(怡隆洋行)의 배편을 이용했다. 정정화는 단동에서 일제 경찰로 위장해 활동하고 있던 최석순의 누이로 가장해 압록강을 건넜다. 그녀는 서울에 도착해 세브란스병원의 유능한 산부인과 의사 신필호(신규식의 장조카)의 집에 묵으면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나섰고, 20일가량 서울에 머물면서 자금을 조달한 뒤 4월 초 상해로 귀환했다.

중국에 남겨진 시아버지 김가진의 유해

정정화는 1차 국내 밀파 이후에도 여러 차례로 국내로 들어와 활동했다. 그녀는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국내에 잠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게 된다. 워낙 담대했던 그녀를 두고 임시정부에서는 ‘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두려움이 없었던 정정화도 세 번째 국내 밀파 때 압록강 철교를 건너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녀는 신의주경찰서를 거쳐 서울 종로경찰서로 압송돼 악명 높았던 친일파 형사부장 김태식의 조사를 받았다. 그녀가 종로경찰서에서 풀려났을 때 시아버지 김가진의 부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74세 고령으로 조국 광복을 위해 상해로 망명했던 동농 김가진은 1922년 7월4일 77세 나이로 불귀의 객이 됐다.

상해 임시정부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김가진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렀다.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김가진의 망명이 가진 의미가 그만큼 컸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가진의 유해는 상해 만국공묘(현 송경령능원)에 안장됐으나 1960년대 문화혁명 때 파괴돼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독립운동유공자로 서훈을 받았으나 김가진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세 차례나 서훈 심사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유해조차 국내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 정정화 선생(1900〜1991년)

임시정부의 이동과 정정화의 헌신

초기 돈과 사람이 넘치던 임시정부는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독립운동세력의 분열이 깊어지면서 그야말로 간판만 남은 상태가 됐다. 임시정부는 1925년 3월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고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인 국무령제로 바꾸었다. 그러나 위기는 계속됐다. 1926년 말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집단지도체제 형태인 국무위원제로 헌법을 개정해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 갔다. 정정화는 김구·이동녕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밥을 지어 주고 빨래를 해 주는 등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했다.

1931년 독립운동 상황이 급변했다. 7월 만보산 사건이 일어났고, 9월18일 일본군이 만주를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만주 전역이 대부분 일본군 통제 아래 들어갔다. 독립운동 조건이 악화되자 임시정부는 새로운 방침을 세우게 됐다. 1931년 말 김구를 단장으로 한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의열투쟁과 특무활동을 강화하기로 한 것이다. 1932년 1월 이봉창 의거와 4월 윤봉길 의거는 이 같은 한인애국단 활동의 빛나는 성과였다. 특히 4월29일 윤봉길 의거는 한국 독립운동의 쾌거일 뿐 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통쾌한 복수극이었다.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피난길에 올랐다. 김구의 목에는 거액의 현상금이 내걸렸고, 일본 밀정의 대대적인 추격을 피해 가흥으로 피신해야 했다. 다른 임시정부 요인들도 항주와 가흥으로 이동했고, 정정화는 가족과 함께 옮겨 가 요인들을 뒷바라지했다. 그러던 중 중국 정부와 교섭을 맡고 있던 박찬익의 주선으로 남편 김의한이 중국 지방행정 관리로 취직하게 된다. 정정화 일가는 1934년 봄 김의한의 임지인 강서성 풍성현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1년쯤 있다가 다시 무령현으로 이주해 3년 가까이 지냈다.

임시정부 안주인 노릇을 하다

1938년 2월 김의한·정정화 일가는 강서성 무령을 떠나 호남성 장사로 가서 임시정부에 다시 합류했고, 이때부터 정정화는 본격적으로 임시정부 안주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38년 5월6일 남목청 사건이 발생해 김구·유동열·이청천·현익철 등 여러 사람이 청년 이운환이 쏜 총을 맞았다. 현익철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절명했고, 김구와 유동열은 상아의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이때 이들을 뒷바라지한 이가 정정화였다.

1938년 9월 초순 대부분의 임시정부 가족들이 광주에서 2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불산으로 옮겨 갔고, 이때 정정화는 임시정부 안살림을 도맡았다. 이후 임시정부는 광서성 유주와 귀주성 귀양을 거처 사천성 남쪽 끝에 있는 기강현에 도착하게 되는 1939년 4월 말까지 머나먼 길을 갖은 고생을 다하며 떠돌아야 했다. 이 과정은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임시정부 안살림은 정정화의 몫이었다. 1940년 3월 임시정부 최고지도자(주석)이자 맏어른이었던 석오 이동녕이 71세 나이로 사천성 기강현에 있는 임시정부 건물 2층 침소에서 사망할 때 그를 간호하며 임종을 지킨 이도 정정화였다.

중경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조직과 체제를 정비했다. 1940년 5월 민족진영 3당을 통합해 한국독립당(중경)을 창당하고, 9월에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10월에는 개헌을 단행해 주석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를 확립했다. 임시정부는 당(한국독립당)·정(임시정부)·군(한국광복군) 체제를 갖춰 독립운동을 주도해 갈 수 있게 됐다. 정정화는 남편 김의한과 함께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했고, 6월에는 한국여성동맹 간사로 선출됐다.

1943년 2월 한국애국부인회가 재건됐고, 정정화는 훈련부 주임에 선출됐다. 여성 차원에서 민족통일전선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애국부인회는 “국내외 부녀는 총단결해 전 민족 해방운동과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민주주의 신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가해 분투하자”는 강령을 선포하고, 각종 매체를 통한 선전활동과 함께 독립운동 지원활동을 적극 펼쳤다.

광복 후에도 시련은 계속되다

광복 후 정정화는 남아서 뒤처리를 다한 다음 1946년 5월9일에야 미군이 제공한 상륙 작전용 함정(LST)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환국 후 정정화는 정치활동은 피했지만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국가 수립에 나섰던 김구와 한국독립당 노선을 지지했다. 정정화는 부통령 성재 이시영이 감찰위원회 감찰위원으로 추천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분단을 온몸으로 막으려 했던 김구는 끝내 암살됐고,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앞길도 험난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정권은 시민들을 남겨 둔 채 도망갔다. 피난을 가지 못한 남편 김의한은 안재홍·조완구·김규식·조소앙·엄항섭·최동오 등과 함께 납북됐다.

▲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남쪽에 남겨진 정정화는 잔류파라는 이유로 부역자로 처벌받아야 했다. 그녀는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 들어왔다가 체포돼 잠시 머물렀던 종로경찰서에서 다시 조사를 받는 신세가 됐다. 그녀는 <장강일기>에서 “종로서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내 심정은 갈가리 찢겨 갔다. 왜놈 경찰의 손아귀에 들어갈 때와 부역죄로 동포 경찰관의 손에 끌려 들어갈 때를 견주어 보는 게 너무나 달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정화는 이병린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요시찰인이 돼 수시로 ‘예비검속’을 당해야 했다. 임시정부의 안주인이었던 독립운동가 정정화는 해방된 나라에서도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분단과 냉전이 가져다 준 굴레였다.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타협 없이 꿋꿋이 걸었던 수당 정정화는 1991년 91세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그녀의 삶은 끝났으나 그 정신은 민주화운동·노동운동·통일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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