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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를 느끼고 싶다면, 비 오는 밀퍼드사운드로!
▲ 최재훈 여행작가

지난번에 이어 뉴질랜드 여행 이야기를 이어 가 보려 한다. 뉴질랜드 여행이 그리 쉽게 갈 수 있는 여행은 아니니, 이왕 시작한 김에 두어 번 더 뽕을 뽑아 보려 한다. 직항을 타고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인 오클랜드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시간30분 정도. 여기에 남섬으로 건너가려면 갈아타는 시간까지 서너 시간은 더 잡아야 한다. 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녹록지 않은 이들이라면 값비싼 직항 비행기를 피해 홍콩이나 싱가포르로 돌아서 가야 하니 적게 잡아도 20시간 이상은 들여야 하는 머나먼 여행길이다. 그런 뉴질랜드 여행길에서도 가장 먼 곳이 바로 남섬의 서쪽 끝에 자리 잡은 ‘밀퍼드사운드’다. 남극과 가깝기로는 동남쪽의 인버카길과 스튜어트섬이 있다지만, 막다른 길로 들고 나야 하는 밀퍼드사운드가 심리적으로는 더 멀게 느껴진다. 남섬 최고의 휴양도시라는 퀸스타운에서 가려 해도 300킬로미터 되는 길을 달려야 하는데, 가는 길의 3분의 1 정도는 좁고 꾸불거리며 오르내림이 심한 산길이라 평지보다 시간을 훨씬 많이 잡아야 한다. 쉴 새 없이 가도 4시간은 꼬박 걸리는 터라, 퀸스타운에서 출발하는 대부분의 당일치기 관광버스라도 이용할라치면 새벽밥을 지어먹고 부랴부랴 떠나야 한다. 캠핑카나 렌터카를 이용하는 이들은 대부분 근처 도시인 테아나우에서 하루를 보내고 여유 있게 출발하는 길을 택한다.

밀퍼드사운드는 피오르 지형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참을 수 없는 지리함에 몸부림쳐야 했던 지리수업을 잘 견뎌 낸 사람이라면 머릿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을 단어 ‘피오르’. 오랜 옛날부터 쌓여 있던 거대한 빙하가 땅을 파고 깎아서 생긴 좁고 깊은 만을 말한다. 등산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세계 3대 트레킹 코스라는 ‘밀퍼드 트랙’으로 잘 알려져 있다. 등산 마니아들에게는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일 정도로 유명한지, 일주일 정도 시간을 내 밀퍼드 트랙과 근처의 루트번 트랙만 딱 찍어 도는 패키지여행을 하는 이들도 제법 있을 정도다. 그 유명세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트레킹이 밀퍼드사운드를 즐기는 한 가지 방법이라면, 배를 타고 두어 시간쯤 해협을 한 바퀴 도는 크루징도 밀퍼드를 즐기는 다른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밀퍼드 크루즈에는 엄청난 변수가 있다. 다름 아닌 ‘날씨 운’이 그것이다. 여행자에게 날씨는 그야말로 재수다. 어렵게 시간을 내고 돈을 질러서 온 여행인데, 온종일 비라도 퍼붓는 날이면 관광이고 뭐고 뒤죽박죽이 되기 마련이고 그 상실감은 쉽게 회복되지도 않는다. 그러니 맑은 하늘이야말로 여행자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호사이며, 행운인 셈이다. 하지만 밀퍼드사운드에서는 그 반대다. 맑은 날의 밀퍼드사운드는 잔잔한 바다를 가운데 두고 길게 이어진 계곡과 푸른 하늘이 사방을 채운다. 절벽 아래 튀어나온 바위 위에는 물개들이 일광욕을 즐기며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중간중간 거칠게 내리쏟는 폭포들이 몇몇 있다지만 이 나른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그런 밀퍼드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전혀 다른 세상이 만들어진다. 검회색의 자갈과 바위, 그리고 울창한 밀림 속에 단단히 갇혀 있던 악마가 날뛰는 세상이 시작된다. 쏟아지는 빗물들은 그대로 산을 타고 내려 수십, 수백 개의 폭포가 돼 산 전체를 뒤덮는다. 배 위에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세차게 부는 바람이 폭포가 돼 쏟아지는 물줄기와 뒤섞여 마치 악마의 비명 같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해협에 온통 소용돌이쳐 댄다. 악마의 비명 소리에 뒤엉키기 시작한 폭포수는 신이 만든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겠다는 듯 절벽을 타고 올라가기까지 한다. 두려움을 버리고 바람과 비와 폭포수의 물보라가 만들어 내는 악마의 기운에 잠시 온몸을 맡기자. 배 앞뒤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다 보면 묘한 해방감이 느껴진다. 배에 함께 탄 얌전한 관광객들에게는 진상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크게 아랑곳할 일은 아니다. 갇혀 있던 일상의 답답함을 한 톨도 남기지 않고 깨어난 밀퍼드의 악마에게 던져 주고 가는 게 밀퍼드에 딱 어울리는 관광법이니까. 그렇게 두 시간. 바람에 쌍 따귀를 맞고, 소리 지르고, 정신없이 사진을 찍다 보면 어느새 배는 부두에 가까워져 있다. 녹신해진 몸을 이끌고 캠핑카로 돌아와 한국에서 가져온 매운 라면 몇 봉을 끓여 먹는 것까지 해내야 비 오는 밀퍼드 여행은 마무리된다. 물론 비 오는 밀퍼드를 여행할 때는 가는 길이나 돌아오는 길에 할 수 있는 간단한 트레킹 코스를 포기해야 하는 아쉬움이 있다. 밀퍼드사운드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키 서밋 트랙은 서너 시간에 밀퍼드 트레킹을 맛볼 수 있는 제법 괜찮은 트레킹 코스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라면 다시 가도 비 오는 밀퍼드를 택할 게다. 이틀 동안 1천밀리미터가 넘는 폭우가 쏟아져 뉴질랜드 남섬 서부 해안에 비상사태까지 선포됐다던 어느 날 밀퍼드사운드를 방문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테지만. 그래서 감히 주장한다. 밀퍼드사운드를 가려면 꼭 날씨를 확인해 보라고.

여행작가 (ecocjh@naver.com)

최재훈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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