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탁 마실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미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프리먼은 조엘 로저스와 더불어 2002년에 컴퓨터 프로그램 오픈소스 운동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노조 조직으로 ‘오픈소스(open-source) 노동조합운동’을 제안한 바 있다. 2004년 ‘미국에서 노동조합 재흥의 길’이라는 글에서는 노조운동은 더 이상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는 대다수 전문가들 전망에, 오히려 경험적으로 보면 역사적으로 서구에서 노동조합은 앞날을 전망하기 어려운 사회적 위기 시기에 성장했다고 주장했다. 유럽에서 대공황 이후 노조 조직률이 급성장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노조가 성장했다. 1970년 석유 위기로 인한 인플레이션 시기에도 유럽 노조들은 성장했고, 미국에서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조직률이 높아졌다. 이러한 성장은 기존 조직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노동자들을 묶을 수 있는 새로운 노조 형태를 만들어 냄으로써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사용자들이 노조에 적대적이고 노동법이 전면적으로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노동조합은 신규로 조합원을 대폭 확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기존 노조로는 포괄하기 어려운 대규모 사업장 바깥에 존재하는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픈소스 프로그램은 각각의 프로그래머들이 다른 프로그래머가 만든 모듈을 공유하고 거기에 새로운 내용을 더해 나가는 방식으로 프로그램을 짜는데 오픈소스 노동조합도 서로 다른 지역, 서로 다른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활동가들이 공통의 협력적 플랫폼과 실천들을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기존 노조와는 가입방식도 다르고 멤버십 내용도 다를 것이지만, 기존 노조의 준조합원이라는 형태가 아니라 노동운동의 본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오픈소스 노동운동의 성패는 그러한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에게 가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지, 단체협약이 없는 상태에서 사용자의 일방적 결정에 대응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키울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그러나 프리먼이 던진 제안은 아직 실천 영역에서 본격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지 않다. 90년대 이후 비정규 노동이 확산하면서 한국에서도 비정규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노력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조직화 방식은 사업장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핵심 요구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였다. 훌륭한 성공 사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전략은 약화돼 가는 노동자들의 조직화된 힘을 되살리는 수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매년 총연맹의 전략에는 비정규직 철폐와 조직화가 늘 최우선으로 설정됐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자면 기존 노조 조직에 자석처럼 조금씩 더 달라붙게 하는 방식이거나 아직 완성 시나리오를 갖추지 못한 채 산별교섭 체계를 요구하는 정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노동조합 조직률이 도약했던 시기를 되비춰 보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조직형태가 무엇인지 기존과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선진국 노동운동만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노동운동 역사도 잘 살펴봐야 한다. 큰 나무 밑에서는 다른 나무들이 잘 자라지 못한다. 90%의 미조직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다른 생장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후 큰 숲을 이루는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명칭은 어떻게 됐든 상관없이 우리 노동운동에도 오픈소스 노동조합이 만들어져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수준 높은 정보통신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플랫폼을 노동운동이 활용하지 못한다면 일종의 임무방기다. 노동조합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안 붙이고는 부차적인 문제다. 노동조합은 자본과 노동의 경쟁에서 노동시장 장악을 놓고 싸움을 하는 노동쪽 도구다. 노동조합은 그 자체로 찬양을 받아야 할 신성한 그 무엇이 아니다. 노동형태가 변하면 당연히 노동시장을 둘러싼 조직 형태도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 한다. 세상은 늘 앞서 길을 개척하는 사람들에 의해 변해 왔다. 열심히 지도만 그리면 무엇 하겠는가? 그 지도를 보고 길을 나서는 사람이 없다면. 아직 많지는 않지만 다행히 진보적 연구자들이 노동을 대변하는 새로운 형태의 조직에 대한 외국 사례들을 공급하고 있다. 지금 길을 나선다 해도 크게 두려워할 일은 아닐 것 같다.

마실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htkim8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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