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3·1 혁명 1주년 기념투쟁으로 구속된 배화여학교 박양순(당시 17세)의 수형인 명부.

1920년 3월1일 경성(서울) 시내는 마치 계엄이 선포된 듯 일제 경찰의 철통같은 경계로 살벌한 분위기였다. 일제는 학생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열흘 정도 임시휴교 조치를 내리기도 하고, 3월1일과 2일 이틀간은 3·1 혁명을 주도했던 세력의 하나인 천도교의 종교행사마저 중지시켰다. 경성시민 역시 누구나 1년 전 오늘이 200만명 넘는 조선인이 참여해 한반도 전역을 뒤흔들었던 3·1 혁명이 시작된 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년 전 크게 당했던 일제는 경성 시내에 경찰을 미리 풀어서 이번에는 모든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 철통같은 경계를 뚫고 ‘3·1 혁명 1주년 기념투쟁’이 경성에서는 배재고보와 배화여학교·진명여학교·경성부인성서학원 등에서 벌어진다. 경성만이 아니었다. 평양에서는 숭실전문과 숭덕학교·광성학교 등에서 만세운동이 일었고, 선천에서는 신성학교 학생들이 인근 보통학교 학생들과 함께 1주년 기념 만세운동을 했다. 평남 평원군 숙천의 양신학교에서는 교장이 학생을 이끌고 만세운동을 선도하기도 했다.

천도교계가 집중 견제를 받아서 그랬는지 ‘3·1 혁명 1주년 기념투쟁’에 나선 학교는 기독교계 학교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일제를 긴장시킨 ‘3·1 혁명 1주년 기념투쟁’

이날 경성과 평양은 물론 대전·대구·마산·목포 등 전국 각지에 ‘대한독립 1주년 기념 축하 경고문’ ‘대한독립 1주년 축하 폐시 경고문’ ‘독립축하가’ 등이 담긴 유인물이 대한국민회·혈성단·전국상업가 일동·전국학생청년 일동 등의 명의로 배포됐다. 일제의 재판 자료에 따르면 이 유인물에는 ‘우리 조선인은 어디까지나 작년 3월1일 독립 선언 취지를 모체로 하고 그 기념일인 3월1일을 기해 조선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남녀 학생은 동맹 휴교를 하고 상가는 폐점해 조선인은 일제히 자유만세를 고창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감옥에서도 1주년 기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서대문 감옥은 물론 “서대문 감옥 태평동 출장소 수인 약 200명이 0시25분과 오후 6시15분쯤에 두 차례 만세를 불렀다”는 기록이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경찰과의 보고서로 전한다. 황해도 황주와 송화·신천 등지에서도 1주년 기념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다는 기록 역시 같은 보고서에서 확인된다.

1년 전 크게 당한 일제는 호들갑을 떨면서 ‘3·1 혁명 1주년 기념투쟁’ 확산을 막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사전에 학교는 임시휴교 조치하고 천도교의 종교행사마저 막았지만, 조선인들의 독립의지를 원천봉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일제는 시위 주동자를 검거하는 등 적극적인 진압에 나선다. 그 과정에서 시위에 직접 나선 학생들뿐만 아니라 ‘대한독립 1주년 기념 축하 경고문’을 제작해 각 학교와 지방에 배포한 이동욱(1895~?, 경성부인성서학교 교사)·장병준(1893~1972, 임시의정원 의원)·박기영(1893~1938, 천도교)·이길용(1899~?, 철도 직원) 등을 체포해 재판에 회부한다.

이를 통해 3·1 혁명 1주년 기념투쟁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돼 일어난 계획된 투쟁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1년 전 전남 무안에서 3·1 혁명을 주도한 후 중국 상해로 망명해 임시의정원 전라도 의원으로 활약하던 장병준과 강대현이 1920년 초에 군자금 조달차 귀국하는데, 이들은 경성의 이동욱과 연계해 3·1 혁명 1주년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벌일 계획을 짜서 추진했던 것이다.

이들은 유인물을 인쇄해 박자선(1880~?)과 표성천(1886~?)이 대전(이길용·한부·최성운)·대구(최일문)·마산(팽동주)·목포(서태철)에 전달해 지역에 배포했고, 목포에서는 태극기도 게양했다.

이 밖에 황해도 황주의 만세운동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창섭과 연계한 기독교도 3인의 주도로 벌어졌다고 일제는 파악하고 있었다.
 

▲ 배화여학교와 진명여학교 학생들의 3·1 혁명 1주년 기념투쟁 상황을 보고한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경찰과 보고서.

3·1 혁명 1주년 기념투쟁을 주도한 이들

경기도 시흥군 본동리 출신의 박양순(1903~?)도 배화여학교 ‘3·1 혁명 1주년 기념투쟁’의 주동자 중 한 명이었다. 당시 10대 배화여학교 학생들은 3·1 만세운동 1주년을 맞아 일제의 철통같은 감시를 뚫고 기숙사 뒤쪽 언덕과 학교 마당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독립만세운동을 한다. 일제가 학교에 대한 임시휴교 조치까지 취했지만, 기숙사 학생들은 어쩌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듯 배화여학교 학생들이 3·1 혁명 1주년 기념투쟁에 적극 나설 수 있었던 데에는 남궁억·김응집·차미리사 같은 민족의식이 투철한 교사들의 역할도 컸다고 알려져 있다.

일제는 학교별로 주모자 수십 명씩을 연행하고 배화여학교의 스미스, 배재고보의 아펜젤러 등 두 외국인 교장을 ‘인가취소’ 조치해 교장직에서 강제로 물러나게 한다.

박양순도 23명의 동료와 함께 구속돼 서대문형무소 여옥사에 수감된다.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 감방에는 감옥에서 3·1 혁명 1주년 기념 옥중 만세투쟁을 한 유관순·어윤희·김향화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양순은 그해 4월5일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언도받고 풀려나는데, 서대문형무소 수형자 명부에 기록돼 있는 박양순은 147센티미터를 겨우 넘기는 작은 키(4척8촌3분)밖에 안 되는 어린 소녀였다.

박양순이 수감돼 있던 서대문형무소 여옥사에는 배화여학교의 3·1 혁명 1주년 기념투쟁으로 투옥됐던 박양순 등 23명의 수감 당시 사진이 전시돼 있다. 당시 박양순과 함께 구속된 23명의 배화여학교 학생들은 김경화·김마리아·김성재·김의순·문상옥·박경자·박신삼·박하경·성혜자·소은명·소은숙·손영장·안옥자·안희경·왕종순·윤경옥·이남규·이수희·이신천·이용녀·지사원·최란씨·한수자 등이다.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다

▲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박양순은 2018년 광복절을 맞아 김경화·성혜자·소은명·안옥자·안희경과 함께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받는다.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언도받은 관계로 실제 징역살이는 1개월 조금 넘어 했다는 이유로 그동안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는데, 관련 규정이 바뀌면서 비로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3·1 혁명 1주년 기념투쟁’에 참여한 지 98년 만의 일이요,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지 60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배화여학교 학생 24명 중 왜 6명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다른 18명은 제외됐는지 곧바로 논란이 됐다. 현재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공훈록을 확인해 보면 이들 6명에, 김마리아·김성재·소은숙·왕종순·윤경옥·이남규·이수희·이신천·이용녀 등 9명이 2018~2019년에 걸쳐 추가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돼 독립유공자로 등재돼 있다. 그럼에도 김의순·문상옥·박경자·박신삼·박하경·손영장·지사원·최란씨·한수자 등 9명은 여전히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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