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유리 <화가의 마지막 그림> 저자

1929년. 25살의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는 에스파냐에서 꽤 촉망받는 예술가였다. 바르셀로나 달마우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어 프랑스 파리 화상인 카미유 괴망스의 눈에 띄었고, 그 결과 곧 파리 예술계에 진출할 터였다. 달리는 훗날 자신의 자서전 <나는 세상의 배꼽이다>를 통해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럴 즈음 나는 갓 전속계약을 맺었던 화상 카미유 괴망스의 전보를 받았다. 계약조건은 3천프랑에 나의 여름 작업을 독점한다는 것이었다. (1929년) 9월이 되면 그의 화랑에서 내 작품들을 전시하고 나는 판매가의 일정 비율을 받기로 했다. 하여간에 그는 3천프랑으로 내 작품 석 점을 골라서 소유할 수 있었다. (…) 아무튼 온다는 전보를 보냈던 괴망스가 피게라스(달리의 고향)에 도착했다. 그는 아직 채 끝나지 않은 내 그림 <음산한 유희>를 보고 열광했다.”

달리는 괴망스의 반응을 보고 자신의 예술에 더욱 확신을 얻었다. 자신감 넘치게 붓을 휘둘러 완성한 이 그림은, 이후 거대한 스캔들을 몰고 오게 된다. 그리고 달리는 순식간에 파리 화단의 주목과 악평을 얻게 됐다. 도대체 <음산한 유희>의 어떤 점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을까.

▲ 살바도르 달리, <음산한 유희(le Jeu Lugubre)>, 1929년, 판지에 유화와 콜라주, 개인소장.

그림 중앙에는 여성의 신체가 있다. 하지만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낱낱이 해부돼 그 파편들이 허공에 어지럽게 분출한 상태다. 희한하게도 여성의 몸은 메뚜기·자갈·달팽이·음부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 그녀의 신체를 가리키는 커다란 손이 왼쪽에 보인다. 이 손의 주인은 그림 왼쪽에 서 있는 동상. 동상은 다른 쪽 손으론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 동상 기단에 걸터앉은 벌거벗은 남성이 동상의 성기를 만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림 오른쪽 하단에는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남녀가 보인다. 바지는 어디로 내버려 두고 속옷만 입고 있는 남자는 괴상하게 웃고 있다. 그런데 그의 더러워진 속옷이 이상하다.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이 남자는 감상자들에게 아주 대놓고 자신의 ‘배설물’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당시 달리는 이미 꿈과 현실, 이성과 광기, 객관과 주관을 구분 짓지 않는 ‘초현실주의’의 촉망받는 기린아였다. 초현실주의 특징은 일체의 선입견과 논리, 도덕을 초월해 예술을 표현하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배설물이 묻은 속옷을 입은 남자를 묘사한 부분은 동료 초현실주의자마저도 동요시켰다. 사람들은 달리가 배설물을 통해 성적 욕망을 충족하고 심지어 배변을 먹는 변태성욕자가 아닌지 의심했다. 식분증(食分證)은 초현실주의자들조차도 참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달리는 이 같은 논란을 이미 예상하고, 단지 유명해지기 위해 의도적으로 배변을 그림 속에 등장시켰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가 배변을 먹는 사람인지 아닌지 해명을 하지 않을수록 더욱더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며 이름을 알릴 수 있었을 테니까.

이 모든 소동에도 1929년 11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달리의 첫 번째 개인전은 대성공이었다. 모두 11점의 작품이 개인전에 걸렸는데 거의 전부가 6천프랑에서 1만2천프랑 사이 가격에 팔렸다. 스캔들을 일으켰던 <음산한 유희>마저도 노아유(Noailles) 자작에게 팔렸다. 이렇게 달리는 파리에서 자신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킨 동시에 초현실주의그룹으로부터 정식회원으로 인정받게 됐다. 달리는 훗날 <어느 천재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의기양양하게 적었다.

“내 작품을 처음 본 브르통(Breton, 초현실주의 주창자)은 분변학적인 요소에 두려움을 느꼈다. 놀라웠다. 나는 똥으로 데뷔한 것이다. 심리적으로 말해, 이것은 내게 황금을 가져다줄 행운의 전조로 해석할 수 있었다. 나는 분변적인 요소가 이 운동에 부(富)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초현실주의자들을 납득시키려 애썼다. (…) 하지만 성과가 없었다. 아무도 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아량 있게 권한 똥을 마다한다면 그 보물을 나 혼자서 갖는 수밖에.”

똥이어도 좋았다. 그 똥이 황금을 부를 수만 있다면! 달리는 스캔들과 논란을 불러일으켜 자신을 팔아먹는 데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결과적으로 상황은 달리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도덕과 상식을 벗어난 그의 행동은 모두 예술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라는 사상이 달리의 행동을 모두 감싸 줬다. 초현실주의는 그동안 유럽을 지배했던 위선과 타락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나왔던 사상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면서 속으로는 욕정이 가득했던 부르주아 도덕률이 휘둘렀던 사회의 속박과 검열·억압이 어떻게 인간의 욕망을 쪼그라들게 했는지 거세게 비판했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 차원에서 이 세계를 재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상황에서 달리의 예술은 ‘초현실주의의 재현’과 다름없었다. 달리에 대한 손가락질이 심해질수록 그의 명성이 높아져 간 것은 물론이다.

달리에겐 대중매체와 대중문화가 제공하는 기회를 정확하게 집어내는 본능도 있었다. 외모가 튀지 않으면 언론의 관심을 끌 수 없다고 생각한 달리는 왁스로 고정한, 하늘로 올라간 모양의 독특한 콧수염을 만들었다. 중력을 거스른 모양의 이 콧수염은 달리를 나타내는 그만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그리고 달리는 겸손이 미덕이었던 시대에 “바로 천재인 척 행동하면 천재가 된다”며 “나는 천재다!”라고 대놓고 말하고 다녔다. 속물이라 욕할까 봐 차마 돈 좋아한다는 얘기를 못 하던 시대에 그는 ‘아비다 달러스(Avida Dollars)’로 살았다. 아비다 달러스는 ‘달러에 욕심내는’이라는 뜻을 지닌 달리의 별명으로, 달리 이름의 철자를 바꿔 만든 것이다.

대중은 남의 눈치를 볼 것 없이 솔직하게 돈을 밝히고, 기발한 생활을 즐기는 ‘스캔들 제조기’ 달리에게 열광했다. 달리의 모국 에스파냐엔 이런 속담이 있다.

“각자는 자신이 만든 작품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속담 속의 말을 아주 충실하게 이행했다. 달리는 자신이 두각을 나타내고 싶은 영역에서 논란을 즐겨 가며 거침없이 활동했다. 타이밍도 잘 맞춰 마침 문화가 비이성을 향해 문을 여는 것이 긍정적이던 시대에 태어났고, 덕분에 그는 단번에 출세할 수 있었다. 어쩌면 사진작가 게오르그 브라사이(George Brassai)의 다음과 같은 말이 달리의 진면목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항상 생각을 한 발 앞지르는 달리의 재치 있는 유머를 좋아하고, 그의 콤플렉스와 진지함, 거침없는 상상력을 좋아하며, 달리의 머리가 돌아가는 방식을 좋아하고…. 가끔은 그의 그림도 좋아했다.”

<화가의 마지막 그림> 저자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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