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노조가 지난달 18일 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와 올해 산별중앙교섭을 시작했다. 사용자측에게 현행 정규직 55% 수준인 저임금직군의 임금을 80%로 상향할 것을 요구했지만 수용되지 않고 있다. <금융노조>

KB국민은행에서 17년째 일하고 있는 서미숙(40·가명)씨. 직급은 계장(L0)이다. 처음부터 정규직(L1)으로 입사한 후배가 상급자인 과장(L2)을 다는 모습을 보면 뭔가 힘이 빠진다.

신입 때 업무를 가르치던 후배가 얼마 후 자신보다 많은 돈을 받고 일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서씨는 “은행은 모두가 한 가족이라고 하지만 여러 차별로 소외감을 느낀다”며 “예전에 사라졌다고 하는 여행원 제도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처럼 느낀다”고 말했다.

여행원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은 1992년 10월부터다. 옛 제일은행(현 SC제일은행)이 시작했다. 그전엔 같이 입사해도 남성은 ‘행원’, 여성은 ‘여행원’으로 분류됐다. 여행원이 승진해야 행원이 됐다. 그로부터 27년이 흘렀다. 그 긴 세월도 은행권에 뿌리내린 성별 격차를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현장 여성노동자들 얘기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여행원이 저임금직군·무기계약직·중규직·준정규직 등 다양한 말로 변주돼 아직 현실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계 노력으로 차별과 격차가 경향적으로 줄어든 것은 맞다. 하지만 대다수 은행에서는 완전한 정규직화의 종착지인 일반직군과의 통합까지는 갈 길이 멀다. 4대 시중은행을 중심으로 저임금직군 운영 실태와 제도개선 사례를 살펴봤다.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늘어난 여성 비정규직
기간제법 영향으로 여성 저임금직군 탄생


서씨 사례는 제도 폐지 이후 여행원이라는 망령이 어떤 과정을 거쳐 되살아났는지를 보여 준다. 그는 2002년 국민은행에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당시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이 살아 있던 시기였다. 은행 창구업무를 하는 사람들이 모조리 여성 비정규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가 금융권에 미친 파장은 컸다. 은행 셋 중 하나가 문을 닫았다. 3년간 4만8천명의 은행원이 일자리를 잃었다. 정규직이 사라진 자리는 여성 비정규직이 메웠다. 2007년 7월부터 시행된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법)은 은행권 고용구조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기간제법은 사용자가 기간제 노동자를 2년 넘게 사용하면 정규직으로 고용하도록 하고 있다. KB국민은행은 2008년 서씨를 포함한 비정규직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했다. 이들은 2014년 정규직이 됐다.

그럼에도 서씨가 “차별이 여전하다”고 밝힌 이유는 뭘까. 전환 방식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국민은행은 당시 L0직군을 새로 만들었다. 정규직 전환자들을 '일반 정규직'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국민은행은 두 가지 경로로 신입사원을 채용하고 있다. 대외적으로 별도 학력구분을 두지 않지만 특성화고 중심의 L0와 대졸 중심의 L1으로 구분했다. 지난해엔 L0 69명, L1 327명을 채용했다. 국민은행은 앞서 L0직군을 신설하며 공식적으로 업무구분을 없앴다. 과거 비정규직이던 직원에게 정규직이 하던 여신업무를 맡기고, 정규직 입사자에게 비정규직이 하던 수신업무를 맡기는 식이다. 서씨가 같은 영업점에서 L1으로 입사하는 신입직원들의 사수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L0는 주임으로 입사해 4년 뒤 계장이 된다. L1은 계장으로 입사해 4년 뒤 대리가 된다. L0 입사자는 4년 후부터 L1 승격시험을 치를 수 있다. 자리가 워낙 적고, 자격 요건이 까다롭기 때문에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원스톱 뱅크라면서 차별은 여전"

서씨는 "은행이 기업이나 VIP창구를 제외하고 모든 직원에게 ‘원스톱 업무’를 맡기려 하고 교육도 하면서 기존 무기계약직의 경력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며 "L0와 L1 사이 임금·승진에 차등을 두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국민은행은 2016년부터 은행 영업점에 예·적금, 여신, 외환과 같은 창구구분을 없애는 ‘원스톱 뱅크’를 추구하고 있다. 국민은행은 앞서 무기계약직을 L0로 전환하며 이들의 근속기간을 1년당 3개월만 인정했다. 여기에 L0와 L1 사이 초임 차가 커 선임과 후임 사이에 임금이 역전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여성 기준 L0 입사자의 초봉은 L1의 70% 수준인 것으로 전해졌다. 백소윤 금융노조 KB국민은행지부 부위원장은 "L0와 L1 사이에 임금격차를 줄이고 과거 무기계약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면서 인정받지 못한 경력을 인정할 것을 은행측에 요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2018년 9월 기준으로 L0직군 구성원은 2천593명이었고 이 중 95.2%가 여성이었다.

이종선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부소장은 “은행들이 무기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고는 하지만 전환 전후 임금이나 노동조건에 별 차이가 없는 것을 감안하면 이들을 '2차 정규직'으로 규정할 수 있다”며 “2차 정규직이라 하더라도 평균임금이 다른 산업에 비해 높기 때문에 이들이 차별을 참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완전한 정규직 전환까지 14년 걸려

다른 은행 상황도 유사하다. 신한은행은 2011년 무기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며 RS(Retail Service)직군제를 도입했다. 일반 정규직과 별도의 승진 시스템을 운영한다. 신한은행과 금융노조 신한은행지부는 2017년 7월 RS직군 자동승진제를 운영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JR(주임)로 입사해 7년이 경과하면 자동으로 SR(선임)로 진급한다. 이전에는 5년차 때 소수 인원을 선발해 승진시키는 구조였는데, 선발 진급과 자동 진급 둘을 병행하기로 했다. 이 중 일부 인원은 다시 5년 후 CR(수석)로 진급한다. CR로 진급한 지 2년이 지나면 RS직군에서 벗어날 기회가 생긴다. 신한은행은 대상자 중 일부를 선발해 과장(4급)으로 승진시킨다. 저임금직군이 온전한 정규직이 되는 데 14년 이상이 소요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인원이 너무 적다. 지난해엔 4명뿐이었다. 국회 정무위원회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신한은행의 RS직군 노동자는 그해 9월 기준 2천376명이었다. 여성이 99.2%를 차지했다. 이들의 평균연봉은 3천700만원으로 일반직(6천900만원)의 53.6%에 그쳤다. RS직군은 일반 정규직과 달리 개인 평가등급에 따른 호봉제를 운영한다. 신한은행 노사는 과거 자동승진제를 도입하며 RS직군 업무를 대폭 늘리기로 합의했다. 그해 RS직군 기본급이 10% 인상됐다.

심은정 지부 부위원장은 “과거 노사합의로 RS직군과 일반직의 직무 범위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게 된 상황에서 이에 따른 정당한 보상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조합원들의 목소리가 높다”며 “당장 RS직군에게도 동일한 호봉제를 적용하고 올해 노사협의회에서 이들을 일반직으로 전환할 것을 사측에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원제한 없는 승진 자격제, 성공할까

KEB하나은행은 올해 초 인사제도 통합을 기점으로 한 발 나아간 승진제도를 신설해 눈길을 끈다. 금융노조 KEB하나은행지부와 사측은 일반 정규직과 구분되는 저임금직군을 '행원B'로 통일하기로 했다. 옛 하나은행이 쓰던 방식이다. 옛 외환은행은 저임금직군을 6급으로 불렀다.

노사는 향후 승진 자격제를 실시하기로 했다. 행원B에 속한 노동자가 세 가지 자격을 갖출 경우 일반 정규직인 행원A로 승진하는 것을 보장하는 제도다. 자격 요건은 △행원B로 입사한 지 만 5년 경과 △4종의 자격증 취득 △연수 과정 이수다. 인원제한이 없는 것이 다른 은행과 비교된다. 노사는 2020년 이후 3년 이내에 승진자격 보유자 전원을 행원A로 전환하기로 했다.

최지아 지부 홍보국장은 “연수 과정과 관련해 노사 협의가 진행되고 있는데 시험 난이도를 대상자들이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는 수준이 되도록 할 것”이라며 “노사가 승진인원에 제한을 두지 않기로 한 만큼 지금의 행원B를 모두 행원A로 흡수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부가 행원B에 속한 노동자를 최소화하려는 이유는 여성에게 집중되고 있는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9월 기준 행원B 노동자는 1천955명이다. 이 중 98.5%가 여성이다. 행원B의 초임 연봉은 3천550만원, 행원A는 5천100만원이다.

"산별노조로 교섭력 강화하고, 정규직 설득해야"

은행권의 비정규직 무기계약직 전환은 2007년 우리은행이 처음 시작했다. 우리은행은 이들을 개인금융서비스직군으로 부른다.

아직도 일반 정규직과 채용절차가 이원화돼 있지만 갈수록 둘 사이의 격차가 완화하는 추세다. 현재 군 미필 직원의 경우 개인금융서비스직군과 일반 정규직의 초봉은 500만원 정도 차이가 난다. 김병욱 의원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기준 개인금융서비직군의 평균연봉은 4천900만원으로 일반 정규직 평균(5천900만원)의 83.1%를 차지했다. 우리은행은 개인금융서비스직군 노동자가 입사 3년을 경과하면 일반직으로 전환하는 기회를 부여한다. 지난해 경쟁률은 2대 1이었다.

금융노조 우리은행지부 관계자는 “매년 400명에서 200명 사이의 개인금융서비스직군을 일반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둘 사이의 임금격차를 상당 수준으로 줄인 상황”이라며 “궁극적으로 저임금직군을 철폐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 저임금직군 문제를 산별교섭 강화로 풀어야 한다는 대안이 제시된다. 이종선 부소장은 “은행권 2차 비정규직은 은행산업이 가진 본질적인 문제로 개별 사업장에서는 풀 수가 없다”며 “산별노조가 산별교섭에서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특히 일반 정규직 조합원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기 쉬운 개별사업장 노조 설득에 나서야 한다”고 제안했다.

금융노조는 은행권 저임금직군 평균임금이 일반 정규직의 55% 수준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올해 산별교섭에서 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에 이를 80% 수준으로 끌어올리자고 요구하고 있지만 녹록지 않다. 사용자단체는 이를 호봉제 폐지와 직무급제 도입 논리로 연결시키고 있다.

정연실 노조 여성위원장은 “과거 똑같이 입사해도 여성만 일정 시간이 지나야 상위 직급인 행원이 될 수 있었는데 외환위기 이후 은행들이 여성 위주로 비정규직을 대거 채용하면서 비슷한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다”며 “은행권 저임금직군 처우개선은 산별노조 차원에서 집중적으로 고민해야 할 사안으로 집행부와 함께 요구가 관철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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