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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입법 후 비준’ 논리는 비준 무산시키려는 속셈권영국 변호사(전 민변 노동위원장)
▲ 권영국 변호사(전 민변 노동위원장)

올해는 국제노동기구(ILO)가 창립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ILO는 6월10일 개최하는 총회에 문재인 대통령을 초청했다. 한국 정부는 난감한 처지에 빠졌다. 1991년 ILO에 152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으나 ILO 회원국으로서 존중하고 실현해야 할 ILO 핵심협약(기본협약)을 아직도 비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비준하지 않은 ILO 기본협약 중 결사의 자유 협약이 가장 논란이다. 노사 단체 결사의 자유와 노동자의 단결권 보장을 내용으로 하는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87호)과 노동자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의 실질적인 보장을 위해 사용자 부당노동행위 금지를 명시한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원칙 적용에 관한 협약(98호)이다. 회원국 187개국 중 87호 협약 비준국이 155개국이고 98호 협약 비준국이 166개국인 점을 고려할 때 참으로 민망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정부는 ILO에 가입한 이래 여러 번 국제사회에 ILO 결사의 자유 협약 비준을 약속했다. 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당시와 98년 ILO 고위급 대표단 방한 당시 조속한 시일 내에 87호·98호를 비준하겠다고 했다. 2010년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시 결사의 자유를 포함한 노동기본권을 국제기준에 부합하도록 하고 ILO 기본협약 비준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문 대통령도 2017년 대선 공약과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서 비준을 약속했다. 2017년 11월 유엔의 3차 국가별 정례 인권검토(UPR) 심의에서 나온 ILO 기본협약 비준 권고에 법무부가 수용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의 기본협약 비준은 안갯속이다.

‘ILO 목적에 관한 선언’(1944년)에서 결사의 자유가 ILO가 기초하는 근본 원칙의 하나임을 확인하고 ‘ILO 헌장’은 전문에서 결사의 자유 원칙을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임을 천명했다. ‘노동조합의 권리 및 시민적 자유와의 관계에 관한 결의’(1970년)에서 결사의 자유 원칙이 시민적 권리임을 명확히 하고, ‘노동의 권리 및 기본원칙에 관한 선언’(1998년)에서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단체교섭권 보장, 차별금지, 강제노동·아동노동 금지 등은 비준 여부와 관계없이 회원국이 준수해야 할 의무를 진다는 점을 확인했다. 결사의 자유 보장을 모든 ILO 회원국의 의무로 확인한 것은 결사의 자유가 갖는 기본적 인권 속성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ILO 기본협약 비준은 국제사회를 향한 약속이자, 국제적으로 인정된 기본적 인권에 대한 이행을 의미한다. 결사의 자유 원칙과 관련된 국제노동기준은 노사가 대화나 협상으로 풀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보장해야 할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에 관한 사항이다. 이는 87호 협약 11조에서 “이 협약의 적용을 받는 가입국은 노동자·사용자가 단결권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 필요하고 적절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한다”고 명시함으로써 국가의 보장의무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와 자본가들은 ILO 기본협약과 관련해 사회적 대화로 풀어야 할 문제이며 국내 노동법을 정비한 후 비준해야 한다며 ‘선 입법 후 비준’ 입장을 취해 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9월 방한한 ILO 사무총장을 면담한 자리에서 “국제노동기준에 맞게 국내 노동법을 정비하는 문제는 다양한 이견이 존재하는 만큼 사회적 대화를 통해 양보와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힘으로써 이런 입장을 더욱 강화했다. 국제법상으로나 헌법상으로나 기본적 인권인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에 관한 국가의 보장의무를 사회적 대화를 통한 타협과 양보의 문제로 둔갑시켜 버린 것이다. 국가(정부)가 주체가 돼 해결해야 할 노동자 단결의 자유와 단결해서 교섭하고 행동할 자유인 기본권 문제를 문재인 정부는 “노사 간 문제로 곡해한 후 노사 간 대화로 풀라고 주문하고 자신들은 뒤로 숨었다”(윤효원).

국회 입법조사처는 “ILO 기본협약 등 국제노동기준을 비준하지 않거나 준수하지 않은 경우 국제사회나 국제기구로부터 협약 비준 압박을, 국제사회로부터 인권·기본권 보호가 취약한 국가, 이른바 노동문제에 반인권적 국가라는 오명을 받게 된다”고 했다. 비준 거부시 “ILO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제재는 회원국 협약 위반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것”이라며 “이 조치에는 무역제재가 포함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ILO 입장”이라고 밝혔다. 국제노동기준 위반이 경제 제재 문제로 비화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이 ILO 기본협약 비준 약속을 지키지 않자 지난해 12월17일 EU가 한국 정부의 ILO 기본협약 비준 지연을 한·EU FTA 노동협약 위반으로 보고 무역분쟁 해결절차에 돌입했다. 2011년 7월 발효된 한·EU FTA 협정문에는 결사의 자유와 단결권, 강제노동 금지, 아동노동 근절, 고용상 차별금지 등 ILO 기본권 선언 원칙을 국내 법·관행에서 실현하고, ILO 기본협약 비준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EU는 2011년 한·EU FTA 효력이 발생한 이후 지속적으로 한국에 기본협약 비준을 요구했으나, 한국 정부의 비준 거부가 지속되자 끝내 분쟁 해결절차에 돌입한 것이다. 지난달 말름스트룀 EU 집행위원회 통상담담 집행위원은 한국을 방문해 조속한 시일에 ILO 기본협약 비준을 위한 가시적 진전이 없을시 무역분쟁 해결절차 마지막 단계인 전문가패널 개시가 불가피하다고 경고했다. 전문가패널 인정시 세계 최초로 FTA 노동조항 위반 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국제적 망신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

문재인 정부는 더 이상 국가의 인권보장 의무를 사회적 대화나 입법 과제로 둔갑시켜서는 안 된다. ‘선 입법 후 비준’ 논리는 국제적인 ILO 기본협약 비준 압력을 회피하고 비준 자체를 무산시키려는 자본가와 관료들의 방해논리일 뿐이다. “법제가 완벽해지고 모든 이해당사자가 만족할 때까지 미룬다면 노동권 보호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보장하기 위한 진전은 더욱 지체될 것”이라는 코린 바르가 ILO 국제노동기준국장의 지적에 정부와 대통령은 주목해야 한다. “노동자의 자유, 노동기본권을 협상하는 나라”는 노동을 존중하는 나라가 아니다.

권영국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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