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꽁지머리에 멋대로 자란 수염은 그가 평생 카메라에 담은 자유로운 생명체를 떠올리게 했다. 야생의 땅 시베리아에서 달궈진 피부는 질기고 억세 보였다. 30년 넘게 맹수를 쫓은 눈빛은 피사체의 그것과 닮았다. 풍모뿐 아니라 이력도 남달랐다. 호랑이·표범·불곰 같은 맹수의 삶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최기순(56·사진) 다큐멘터리 감독 얘기다. 그는 젊은 시절 국내 최초로 러시아 야생호랑이를 카메라에 담는 데 성공했다. 야생호랑이 위용에 반해서일까, 지금껏 맹수의 흔적을 더듬고 있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9일 오후 서울 서교동 사무실에서 최기순 감독을 만났다.

호랑이 만나려고 두 달간 나무 위에서 살아

최 감독은 1988년 EBS에 입사해 방송용 카메라 촬영기술을 배웠다. 제일기획 뉴미디어팀·삼성영상사업단에서도 일했다. 전문 분야는 휴먼다큐. 98년 MBC가 광복절 특집으로 방영한 <남극점을 가다> 제작팀에 합류한 것이 지금의 분야에 발을 들인 계기가 됐다.

“당시 허영호 대장이 국내 최초로 남극대륙 도보횡단 프로젝트를 짰습니다. 1천800킬로미터를 걸어 뉴질랜드까지 가는 것이 목표였죠. 팀원으로 합류해 촬영을 맡았습니다. 68일을 걸어 97년 2월21일 남극점에 도달했지만 결국 실패했어요. 식량계획을 잘못 짰던 겁니다.”

그는 같은해 3월 초 귀국했다. 몸과 마음이 녹기도 전에 EBS에서 연락이 왔다. 한국에서 건너간 것으로 알려진 시베리아 야생동물의 생태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제작진은 그가 남극 추위를 견딘 인물이라는 점을 높이 샀다고 한다. 비행기를 타고 러시아 시호테알린산맥으로 날아갔다. 그곳 타이가 숲은 지구상에서 유일한 시베리아 호랑이 서식지다.

“호랑이를 찍으러 갔는데 7개월 동안 못 만났어요. 장치나 센서를 이용한 촬영은 몇 번 있었지만 시베리아 호랑이를 카메라로 직접 찍은 사람은 전 세계에도 몇 사람 없거든요. 제작 도중 촬영팀장이 승진하면서 제가 팀장을 맡게 됐죠.”

최 감독은 자신이 팀장이 된 것을 계기로 촬영 작전을 변경했다. 우거진 숲속 나무 꼭대기에 올라 텐트를 친 뒤 호랑이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보통은 나무에 올라도 2~3일에 한 번씩 땅으로 내려와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한다.

“남극 탐험으로 식량의 중요성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준비한 두 달치 음식을 들고 나무 꼭대기에 올랐어요. 제작진에게 호랑이를 찍어야만 내려오겠다고 했죠. 그곳에서 먹고 자고 용변을 해결하면서 호랑이를 기다렸습니다.”

2분간의 마주침, 차마 카메라도 못 들어

나무 위에서 호랑이를 기다린 지 4일째 됐을까, 숲속 분위기가 묘해졌다. 그날 곳곳에 설치한 열감지 센서 하나가 작동했다. 호랑이가 센서 10미터 이내로 들어왔다는 뜻이다. 해질 무렵 어스름이 내려앉을 때였다.

“텐트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습니다. 나무 위에서 직선거리 15미터 너머에 호랑이가 있더군요. 호랑이도 저를 쳐다봤습니다. 2분 정도로 기억하는데, 손에 땀이 흥건했어요. 차마 카메라를 들지 못했습니다. 오랜 기다림의 순간이 언제 어떻게 끝나 버릴지 몰랐기 때문이에요.”

그는 호랑이와 다시 만날 것을 직감했다. 촬영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다시 기다렸다. 며칠 만에 같은 호랑이가 왔던 자리로 거슬러 올라왔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때 그 장면을 촬영한 것을 시작으로 최 감독과 호랑이의 만남이 주기적으로 이뤄졌다. 다큐멘터리 제작은 1년간 이뤄졌다. EBS는 98년 7부작 다큐멘터리 <시베리아, 잃어버린 한국의 야생동물을 찾아서>를 방영했다. 국내 최초로 직접 촬영한 시베리아 호랑이 모습을 선보였다.

해당 작품은 그해 연말 백상예술대상을 비롯한 각종 방송상을 휩쓸었다. 호랑이와의 인연은 그를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야생동물 전문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이끌었다. 최 감독은 러시아를 다녀온 뒤 EBS에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자신이 시호테알린산맥에서 살면서 1년에 2개의 자연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한국으로 보내겠다는 것이다. EBS는 거절했고, 최 감독은 사표를 냈다.

2000년 자비를 들여 러시아로 떠났다. <미샤·마샤의 아기곰 홀로서기> <아무르 타이가의 혼> <호랑이의 땅>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 최 감독은 “다큐멘터리스트가 된다는 것은 방송의 모든 환경과 제작시스템을 혼자서 이해하고 꾸려 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이유다.

한반도에서 사라진 맹수를 쫓아

그는 맹수, 그중에서도 한반도에서 사라진 짐승에 유독 관심을 보인다. 영상뿐 아니라 사진으로도 촬영해 여러 번 전시회를 열었다.

“한반도에서 사라진 동물이 많습니다. 호랑이·반달곰·표범·불곰 등이 있죠. 누군가는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그래야 왜 자연이 소중한지,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지를 알 수 있죠.”

최 감독은 혼신을 다해 찍은 영상을 보고 우리나라가 과거 맹수의 서식지였음을 사람들이 알게 됐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한국표범 하산계곡의 포효>와 <한국표범의 마지막포효>가 그런 작품이다.

두 작품은 과거 두만강 지역에서 서식하던 한국표범이 러시아 연해주 하산으로 이동해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최 감독의 작업은 현재 진행형이다. 내년에는 20년 이상 한국표범 발자취를 쫓은 과정을 집대성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개봉한다. 제목은 <표범>으로 지을 예정이다.

"막바지 단계입니다. 5% 정도 남았어요. 에필로그와 프롤로그를 만들면 됩니다. 아들이 5살 때 표범서식지에 있는 연구소에서 지낸 적이 있어요. 그때 아들과 함께 만났던 표범을 아들이 23살이 된 지금 만나는 내용으로 작품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그는 과거 러시아 체류 중 현지 여성을 만나 가정을 꾸렸다.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다. 그때 아내와 지금은 헤어졌다고 한다. 자연과 생명을 영상에 담는 일의 8할은 기다리는 일이다. 최 감독은 혼자 보기 아까운 자연의 경이로운 풍경을 자주 접했다. 주변에 시베리아의 아름다움을 꼭 보여 주고 싶다고 했다.

"시베리아의 아름다움 나누고 싶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시베리아의 풍광을 꼭 보여 주고 싶어요. 그 땅에 직접 서 있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표현으로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슴으로 이해할 수 없거든요. 푹신푹신한 툰드라 숲을 맨발로 걷다 보면 숲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을 느낄 수 있죠.”

최 감독은 몇 차례 아이들을 대상으로 시베리아 현지체험 여행 프로그램을 운영한 적이 있다. 지금은 대상을 성인으로 바꿨다. 부모가 먼저 자연의 아름다움을 체험해야 아이들도 눈을 뜰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올해 7월에는 지인들과 함께 불곰의 땅으로 알려진 툰드라 캄차카에 간다. 호랑이가 살고 있는 시호테알린산맥 타이가 숲과 바이칼 호수도 탐방할 계획이다.

그는 강원도 홍천군 일대에서 2만3천여제곱미터(7천여평)의 숲을 일구고 있다. 나무 위에 집을 짓고, 러시아에서 만나 매료된 자작나무를 심었다. 그곳에서 생태체험장 <까르돈>을 운영한다. 까르돈은 러시아말로 자연보호구역 안에서 자연을 지키는 사람들이 사는 집을 가리킨다.

러시아는 100여개의 자연보호구역을 운영한다. 러시아의 남다른 자연 사랑 탓인지, 시베리아 호랑이 개체수가 350마리에서 700마리로 늘었다고 한다. 그의 꿈은 시베리아 호랑이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드는 것이다.

최 감독은 “호랑이 개체수가 늘어남에 따라 인간과 호랑이가 사는 땅의 영역이 겹치고 있다”며 “호랑이의 땅에 인간이 들어가 한 세기를 살았다면 이제 그들에게 숲을 양보해야 할 때는 아닌지, 인간과 숲의 공존 문제를 영화에 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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