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손정도(1882~1931) 목사. <국사편찬위원회>

임시의정원 의장과 임시정부 활동

독립운동가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다. 그들 중에는 독립운동 수단으로 기독교를 선택한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독립운동에 큰 도움이 되지 않으면 다른 이념이나 종교로 전향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김구·안창호·주시경·이동휘·여운형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이들과 달리 기독교 신앙에 충실하면서 민족운동에 참여한 경우도 있다. 이러한 ‘기독교 민족운동가’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손정도(1882~1931) 목사다.

손정도는 해석(海石 : 바다의 돌)이라는 호가 말해 주듯 바닷속에 숨은 돌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독립운동을 편 사람이었다. 그는 목회와 독립운동을 일치시키면서 “우리 민족을 위한 걸레가 되겠다”고 한 인물이었다. 자기를 더럽히면서 남을 깨끗하게 하는 걸레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빛나게 하는 존재로 살고자 했다.

1913년 11월5일 ‘진도 유배’에서 풀려난 손정도는 1915년 4월 현순 목사 후임으로 정동교회에 파송됐다. 그는 3년간 목회활동을 하면서 교회를 크게 키웠다. 그러나 그의 꿈은 다른 곳에 있었다. 손정도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기 보름 전인 2월15일 “엽전 꾸러미를 꿰매 단 옷을 입고, 상주로 변장한 채” 망명길에 올랐다.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날 때 손정도는 북경에 있었다. 3월26일께 손정도는 국내에서 연락원으로 파견된 현순과 함께 상하이로 갔다. 프랑스 조계 진선푸(金神父)로에 자리를 잡은 손정도는 현순과 함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활동에 나섰다.

손정도는 1919년 4월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이 됐고, 임시정부 평정관, 임시의정원법 기초위원 등으로 활약하면서 초기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조직 체계를 잡는 데 깊숙이 관여했다. 1920년 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김철·김립·윤현진·김구·김순애 등과 의용단을 창설했다. 백영엽과 함께 안창호의 흥사단에도 가입해 원동임시위원회를 조직했다. 1921년에는 임시정부 국무원 교통총장을 역임했다. 1922년 10월에는 김구·조상섭·김인전·이유필·여운형·양기하·박은식·조동하 등과 함께 ‘군인 양성과 독립전쟁 비용 조달’을 위한 한국노병회(韓國老兵會)를 창설, 노동부장으로 활동했다.

손정도는 상하이 한인교회 상의회 위원으로 교회 운영에 참가했고, 교회 부속학교로 설립된 인성학교 교장으로도 근무했다. 1920년에는 현순과 함께 ‘임시정부 대표’로 베이징에서 열린 ‘미국감리회 동아시아총회’에 참석, 한국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921년 3월에는 기독교 목사 이원익·김병조·김인전·조상섭·백영엽·송병조·장덕로 등과 함께 미국과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한국 독립운동의 지원을 요청하는 ‘대한예수회 진정서’를 발표했다.

“우리는 죽을 일만 했소”

3·1 운동의 기세와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의 힘을 모아 출범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초기부터 이념(민족주의·사회주의)과 노선(외교론·실력준비론·무장투쟁론), 지역(서북파·기호파) 등을 둘러싸고 갈등·대립했다. 1921년 1월 이동휘가 국무총리직을, 4월에는 김규식이 학무총장직을 사퇴하면서 임시정부는 내각 조직도 어려운 상황으로 전락했다. 이승만에게 사태의 책임을 요구했으나 끝내 사퇴를 거부함으로써 탄핵당하고 만다.

혼란이 계속되면서 임시정부 주변에 몰려들었던 독립운동가들이 하나둘씩 떠났다. 손정도는 1923년 1월 각 정파의 이견을 해소하고 임시정부를 개조·재편하기 위해 소집된 국민대표회의에 ‘평안도 대표’로 참석해 활동한 것을 마지막으로 임시정부를 떠났다. 만주 길림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손정도는 한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밥 먹고 나(이) 먹고 한 일은 죽을 일만 했소. 로마 1장 29절·32절을 보시오. 우리는 독립운동 5년에 한 일이 무엇이오. 역시 죽을 일만 했소. 종잇조각에 떠다니는 일은 제 동포 죽이는 일이오. 우리는 첫째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해야 하겠소. 또한 호조(互助 : 서로 도와줌)하는 몸이 생겨야 하겠소. 죽음에서 나오지 아니하면 삶을 얻지 못하오.”(<손정도 목회수첩>)

이 말 속에 상하이임시정부 활동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만주 길림 활동과 이상촌 건설 운동

1924년 9월 미국감리회와 관계를 회복한 손정도는 길림에 목사로 파송됐고, 독립운동가들을 적극 지원하며 연계를 가졌다. 1926년 3월1일 손정도는 자신이 시무하던 길림교회에서 양기탁·왕삼덕·최일·박기백 등과 함께 3·1 운동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했으며, 일본 경찰이 ‘제3세력’으로 지칭한 현익철·김동삼·오동진·최명식·이탁·김좌진 등의 무장투쟁을 지원했다. 1927년 2월 길림을 방문했던 도산 안창호가 강연회 도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에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북만주 액목에 있던 손정도는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교섭국 통역으로 있던 오인화와 함께 길림성 당국자 및 베이징의 장쉐량(張學良)과 교섭해 석방을 이끌어 냈다.

손정도와 안창호는 ‘호형호제’하는 깊은 관계였다. 안창호가 길림을 찾은 것은 자급자족을 통한 농촌 공동체 및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서였다. 안창호의 길림 방문을 계기로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설립했다. 농민호조사는 발기문에서 ‘가난한 농민들이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조의 정신과 능력으로 스스로를 구제’할 수 있는 길은 ‘가난한 농민끼리 단결해서 상호 협조하고 협동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농민들의 단결을 통한 생산협동, 교육협동, 풍화향상(風化向上), 보위안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일제의 만주 침략과 함께 모든 활동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손정도는 길림 활동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봉천을 거쳐 베이징으로 옮겼다. 그는 봉천과 길림을 오가면서 잔무를 처리했으나 갈수록 건강이 나빠졌다. ‘가츠라 타로 암살음모 사건’ 때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온몸이 쑤시고 아파서 밤잠도 자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손정도는 길림의 여관방에서 혼자 지내며 생활하던 중 1931년 2월19일 임종을 지키는 사람도 없는 가운데 다량의 피를 토하고 세상을 떠났다.

손정도의 기독교와 민족운동

손정도는 기독교 신앙과 독립운동을 접맥시키고자 한 ‘기독교 민족주의자’였다. 손정도가 꿈꾼 세상은 기독교에 기초한 평화와 사랑의 세계였다. 그는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고 조선민족을 핍박하는 상황에서 기독교를 현실을 개혁해 나갈 힘으로 봤다. 그는 자신과 조선민족이 처한 식민지 현실을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로 상황으로 이해했다.

손정도는 기독교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자였지만 사회주의를 배척하지 않았다. 그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반대했지만 자본주의 옹호자도 아니었다. 그는 계급주의와 자본주의를 모두 ‘현대의 큰 죄악의 발견’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 강연초안에서 이렇게 썼다.

“기독의 사회주의가 앞으로 실현돼야 합니다. 우리가 시대의 흐름을 쫓아 기독의 정신을 발휘하니 조선 국내나 만주나 기독교적 신농촌이 조직돼야 하겠고, 앞으로는 네게 있는 소유를 다 이 농촌에 들여놓겠느냐 하는 문답으로 그이가 교인이 되고 못됨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손정도의 사상은 ‘모으는’ 자본주의보다 ‘나누는’ 사회주의에 더 가까웠다. 자본을 이웃과 함께 나눔으로써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려는 기독교 사회주의의 사고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김일성의 ‘생명의 은인’이 된 손정도

손정도는 남과 북이 모두 인정하는 드문 독립운동가다. 북한에서 손정도는 김일성의 ‘생명의 은인’으로 불리고 있다. 김일성은 “내가 길림에 와서 육문중학교에서 3년 동안이나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손정도와 같은 아버지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김일성에 의하면 손정도 목사는 길림에 온 후 일본 경찰들이 ‘제3세력’이라고 규정한 혁신파 인물들과 연계를 가지고 활동했는데, 새 세대 젊은 청년들과도 잘 어울렸다고 한다. 김일성은 “손정도 목사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면 무엇이건 다 해결해 주고 우리의 혁명활동을 충심으로부터 지지해 줬기 때문에 나는 그를 친아버지처럼 존경했다”고 했다.

▲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김일성은 특히 중국 관헌에 체포돼 길림감옥에 갇혔을 때 큰 도움을 받았다. 손정도 가족들이 뒷바라지를 해 줬고 중국 군벌에 손을 써서 조기에 풀려나게 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 생명의 은인” 등으로 손정도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나타냈다.

김일성과 손정도의 호의적인 관계는 그 자식들까지 이어졌다. 손정도의 차남 손원태는 미국으로 건너가 병리학자가 됐는데, 1991년 북한 초청으로 방북해 김일성에게 환대를 받았다. 2005년 손원태 박사는 북한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 큰아들 손원일은 대한민국 해군 창설의 주역으로 국립현충원에 묻혀 있다. 손정도의 두 아들이 각각 남북의 국립묘지에 안장된 것은 20세기 한반도 역사의 극적이고도 기구한 단면을 보여 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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