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훈 여행작가

기억 못 하실 이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앞서 칼럼에서 뉴질랜드 캠핑카 여행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다. 불편한 자유에 최적화된 뉴질랜드 캠핑카 여행을 딱 12년 만인 지난달 다시 할 수 있었다. 7명의 친구들과 두 대의 6인승 캠핑카를 끌고 3주 동안 뉴질랜드 남섬을 한 바퀴 휘휘 도는 여행의 시작과 끝은 모두 남섬 최대 도시인 크라이스트처치였다. 12년 전 크라이스트처치는 내게 아주 특별한 인상으로 기억됐다.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 지도 한 장 딸랑 들고 길을 찾겠노라며 낑낑대다 어딘지도 모르고 도착했던 뉴브라이튼 해변의 야수처럼 돌진하던 거친 파도. 해변 뒤쪽 어느 고급 빌라 앞에서 라면 몇 봉지를 뜯어 먹은 뒤, 한숨 돌리려 찾았던 광장에서 만난 웅장했던 크라이스트처치 성당. 성당을 중심으로 광장 곳곳에서는 찬란한 여름 햇빛 아래 노련한 마술사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고, 스케이트보드를 탄 젊은이들이 한껏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광장의 경계는 뉴질랜드 국민 음식인 피시앤칩스와 커피, 아이스크림을 파는 푸드 트럭들의 차지였다. 광장에서 두 블록 정도 위쪽에 자리 잡은 해글리 파크의 오래된 나무들은 낯선 도시에서 커다란 캠핑카까지 운전하느라 정신 줄을 겨우 붙들어 매고 있던 여행객에게 저마다 만들어 낸 그늘 아래에서 피톤치드 한 사발 들이킬 수 있는 여유를 환영인사 대신 건네줬었다.

그렇게 담아 뒀던 크라이스트처치에 대한 기억을 꺼내 들고 12년 만에 그 도시를 다시 찾았다. 그리고 내가 붙들고 있는 이 도시에 대한 기억이 그저 낡은 동아줄에 불과했다는 걸 느끼는 데 걸리는 시간은 몇 분이면 충분했다. 2011년 크라이스트처치를 뒤흔든 대지진은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대성당과 함께 수많은 건물을 무너뜨렸고, 도로는 갈라지고 치솟았고, 시민들은 도시를 버리고 떠났다. 그렇게 8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도시는 여전히 지진 트라우마에 갇혀 허우적대고 있었다. 찬란한 햇빛 아래 생명력을 뽐내던 광장은 무너진 대성당 주변으로 빙 둘러쳐진 공사용 철책의 스산함이 대신하고 있었다. 도시 곳곳에서는 아직 손대지 못한 지진 피해 건물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도시 전체가 무너지거나 갈라진 건물을 다시 세우는 리빌딩 공사로 분주했다. 지진 이전의 도시 모습을 회복하려면 아직도 몇 년은 더 있어야 할 것처럼 보였다. 무거운 마음으로 발길을 향한 곳은 ‘종이 성당’. 정식 명칭은 크라이스트처치 트랜지셔널 캐세드랄. 대성당이 무너진 뒤에 임시로 세워진 이 성당은 내부 기둥들을 모두 커다란 종이 통기둥(두루마리 화장지의 심을 몇백 배로 키운 기둥을 생각하면 된다)으로 만들어 ‘종이 성당’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곳이다. 성당 안으로 한걸음 들어서면 종이가 주는 특유의 부드럽고 따스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도시 전체를 장악하는 날카로운 공사 소음으로부터 잠시나마 떠나 마음을 추스르기 좋은 곳이다. 1995년 고베 대지진 때 이재민을 위한 종이 임시주택을 만들었던 건축가 반 시게루가 같은 아픔을 겪은 크라이스트처치 시민들에게 안겨 준 위로의 메시지인 셈인데, 제대로 위로가 될 것 같다.

성당을 나와 해글리 파크로 향했다. 무료 주차장이라 차를 그곳에 세워 둔 것도 이유지만, 2주일 전 뉴질랜드를 공포와 좌절로 몰아넣은 테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을 보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이라는 뉴질랜드 시민들의 최고의 가치를 송두리째 앗아 가 버린 최악의 이슬람사원 테러. 자연이 남긴 흉터가 채 지워지기도 전에 인간에 의한 흉터가 잔인할 정도로 깊고 날카롭게 크라이스트처치를 파고들었다. 어젯밤 숙소에서 한국인 친구를 둔 소말리아 출신 이민자 하산이 해 준 그날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신도 그날 바로 거기에 있었다며 담담하게 말을 꺼내던 하산. 평화롭던 예배 시간, 갑자기 울려 대기 시작한 총소리에 놀랄 틈도 없이, 피 흘리며 쓰러져 가는 친구들 사이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죽은 척하는 것밖에 없었다는 하산. 그의 한국인 친구는 하산이 사원을 빠져 나오는 모습이 찍힌 신문 스크랩을 보여줬다. 하산은 어디에나, 어느 인종, 민족에게나 좋은 이들과 나쁜 이들이 섞여 있는 것이라며, ‘이 또한 신의 뜻’이니 자신들은 그저 그 뜻을 헤아리려 노력할 뿐이라 했다. 그렇게 애써 스스로를 추슬러 가는 모습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해글리 파크로 들어가는 담장을 따라 끝도 없이 이어진 꽃과 카드, 편지와 인형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꽃과 인형들 사이에 유독 눈에 띄는 문구 하나.

“They are Us. We stand together.”

지진에도 끄떡없이 도시를 버텨 주며 시민들을 위로해 주는 해글리 파크의 수백 년 된 나무들처럼 서로를 한 뿌리의 나무처럼 보듬어 안으려는 시민들 사이의 이런 믿음도 흔들림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문득 꽃 한 송이, 메모 한 장 준비할 여유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는 여행객의 빈손이 민망해졌다.

여행작가 (ecoc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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