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동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부원장(변호사)

<필라델피아 정신>(알랭 쉬피오 지음, 박제성 옮김). 지난달 매일노동뉴스에서 야심 차게 출간한 책이다. 연휴를 이용해 읽기 시작했지만, 얕은 배경지식 탓인지 매우 어렵다. 능력의 한계가 있음을 솔직히 자백한다. ‘시장전체주의 비판과 사회정의 복원을 위하여’라고 쓴 부제처럼 저자는 국경이 사라진, 그래서 인간과 노동의 가치가 사라진, 황폐화된 오늘의 세상(특히 유럽)을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고 복원하기 위해 필라델피아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고 되풀이해서 강조한다.

저자는 자본과 노동, 노동과 노동 간의 격차가 점점 벌어져 가는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사회정의 실종’의 대표적인 예로 허울로 전락한 ‘복지국가’를 들었다. ‘있는 자’들이 복지국가마저 ‘사유화’한 지 오래기 때문이다. "있는 자가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마태복음(25:29)에 빗대어 이러한 현실을 ‘마태효과’라고 설명했다. 약자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만든 복지제도의 혜택을 강자가 먼저 누리는 모순된 상황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비교해 보자면 우리의 모습은 더 비참하다. 지니계수를 보면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에서 네 번째로 불평등하다. 2017년 우리나라 지니계수는 0.355로 OECD 평균(0.317)보다 훨씬 높다. 그러고 보면 사회복지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는 수많은 제도의 혜택이 본래 취지는 간데없는 예가 허다하지 않은가. 소위 ‘능력에 따라 부담하고 그 능력에 비례해 누려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화한 지 오래다.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문재인 정부는 복지예산을 늘리려 노력하고 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나름 평가할 만하다. 그런데 이에 대한 ‘있는 자’측의 저항이 예상을 뛰어넘는다. ‘문재인 정권, 나라곳간 거덜 내나’, ‘올해 우리나라 복지예산은 162조2천억원, 총예산의 3분의 1을 넘는 수준’이라며 ‘복지 망국론’을 들먹인다. 할 수만 있다면 복지에 관한 세금은 ‘내기 싫다’는 말이고, 설사 내더라도 ‘낸 것 이상으로 더 많이 누리겠다’는 마지노선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 아닌가.

복지 분야만이 아니다. 당연히 누려야 할 노동기본권에서도 더 약한 노동자에게는 불안전하다. 저자는 “약자는 사실상 파업권을 박탈당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예를 들어 ‘에어프랑스 조종사는 파업을 할 수 있지만, 파리공항에서 짐을 옮기는 하청노동자들은 파업을 할 수 없다’는 현실을 보여 준다. 아마도 양자 사이 임금에서 적지 않은 격차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 노동현장 현실은 이보다 심각하다는 사실은 굳이 긴말이 필요치 않을 듯하다.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조건으로 만족해야 하는 1천만 노동자들이 ‘제대로 파업 같은 파업을 했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저자의 통찰력은, 이른바 사회정의의 마지막 수호자여야 할 ‘법과 법원’이, 어떤 방식으로 ‘시장전체주의’로의 쾌속질주에 기여했는지를 분석하는 대목에서 빛난다. ‘법치’는 서로 다른 법률에 구속되는 영토의 다양성 속에 자리를 잡아야 함에도(법률의 영토적 편입), ‘자본과 상품의 전 지구적 자유 이동을 방해할 수 있는 모든 국경을 폐지하고자 하는 운동’에 의해 위태로운 상황에 빠졌다고 우려한다. 특히 유럽사법사재판소가 노동조합을 상법에 구속시키는 판결을 이어 가면서 위와 같은 시장전체주의로의 경향을 사법적으로 합법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한다.

요즘 사법적폐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그것도 정리‘해고’와 통상‘임금’ 같은 모든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노동사건에서 대법원이 조작에 앞장섰다는 게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아닌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에 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분야에 복무하고 있는 필자도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는 노동현장의 가장 큰 현안이다. 1998년 채택된 ILO 노동기본권 선언에서는 네 가지 기본과 원칙을 규정하면서 ‘단결의 자유와 단체교섭권의 실질적 인정’을 맨 앞에 놓았다고 소개한다. 핵심협약을 하루라도 빨리 비준해야 할 또 하나의 분명한 이유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 1944년 필라델피아 선언의 네 가지 기본원칙은 1919년 이래 선언적으로만 존재하던 ‘사회정의’를 구체화한 최초의 정의다. 필라델피아 정신이 실천된 기간은 그 이전에 비해 노동이 존중받고 노동자 삶이 나아졌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극단적 자유주의, 시장전체주의가 그 세력을 넓히는 오늘, 우리가 필라델피아 선언을 읽어야 하는 까닭이다.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부원장(변호사) (94kimhy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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