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양평리 3·23 만세운동을 주도한 탄원기의 항소를 기각한다는 내용을 담은 경성복심법원의 판결문. <국가기록원>

탄원기는 1919년 3월23일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면 양평리(현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징역 6월의 형을 선고받은 인물이다. 판결문에 나이가 50세로 기재돼 있는 것으로 봐 1869년생으로 짐작되는데, 기독교 신자라는 것과 당시 직업이 직공(노동자)이라는 것 외에는 탄원기의 신상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더 이상 없다.

다만 판결문에 “피고는 전부터 조선독립의 희망을 품고 있었는데, 대정 8년(1919년) 3월23일 오후 9시경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면 양평리 보리밭에서 군중들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있어 크게 그 행동에 찬동해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이에 참가해 독립만세를 연호함으로써 안녕 질서를 방해한 자”로 묘사돼 있고, 판결문에 인용된 신문조서에 “(나는) 일한병합 이래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고 있었는데 (…) 조선을 독립시키기 위해 미친 듯이 용감히 뛰어 이에 가담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 사실로 볼 때 탄원기는 조선독립에 대한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영등포·노량진 일대의 ‘3·23 독립만세운동’

1919년 3월1일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의 함성은 같은달 5일 남대문 시위를 거치면서 전국으로 확산돼 나간다. 한강 이남의 시흥군에서도 3월7일 시흥보통학교(현 서울시흥초) 학생 전부가 동맹휴교를 했지만(주모자 5명이 출교조치 당한다) 한동안 잠복기를 거친 후 마침내 3월23일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진다.

하루 전인 3월22일 남대문 근처 봉래정에서 발생한 차금봉을 비롯한 철도노동자 등 800여명의 ‘노동자대회’를 신호탄으로 훈련원 500여명, 의주통 800여명을 비롯해 밤 11시께 종로 단성사에서 활동사진(영화)을 보고 나오는 군중들의 만세운동에 이르기까지 경성시내 곳곳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난다.

다음날인 3월23일에는 종로 광장·남대문통·동대문안 등 서울시내는 물론 서울 외곽으로 확산된다. 한강 이남의 시흥군에서는 노량진·영등포·당산리·양진리·양평리 등 5군데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서울을 둘러싸고 있던 고양군에서는 한지면 왕십리, 숭인면의 돈암리·동묘리·청량리, 마포 양화진, 용강면의 공덕리·동막리·당인리, 연희면의 합정리·수색리·창천리, 은평면의 신사리·역촌리·녹번현, 신도면의 구파발리 등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날의 만세운동은 모두 저녁 8시께부터 시작됐다는 점에서 하나의 기획 속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3월23일의 만세운동이 다음날인 3월24일자로 발행된 <조선독립신문>(9호)에 자세히 실렸다는 점도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조선독립신문>(9호)의 첫 기사는 “한성 안팎의 산천을 울린 만세 소리”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하고 있다. 만세운동의 시작 시간을 7시께로 보도하고 있는 점과 참여자 규모가 훨씬 크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의 정보보고 ‘독립운동에 관한 건’(25보)과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지난 23일 오후 7시부터 경성시내에서는 종로 광장·남대문통·황금정·동대문안과 시외에서는 청량리·안암천·왕십리·청파·동막·마포·공덕리·아현·만리현·노량진 등 30여곳에서 4천~5천명, 혹은 5천~6천명의 독립군이 출동해 일제히 독립만세를 높이 외쳤다. 만세 소리가 마치 잠들어 있는 것 같았던 남쪽의 목멱산, 북쪽의 백악산,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에 울려 퍼져서 5만호의 주민이 살고 있는 시내 전체가 들썩들썩했다. 군중들은 밤 11시 무렵이 돼서야 비로소 해산했다. 시내와 시외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된 의로운 용사가 2천800명이나 됐고 중경상자가 700여명이며 사망자는 14명이라고 한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현대어는 정숭교)

탄원기도 함께한 영등포·노량진 일대 ‘3·23 독립만세운동’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는 더 분명해진다. ‘독립운동에 관한 건’(25보)에는 경기도 시흥군 북면의 노량진, 영등포면의 영등포·당산리·양진리·양평리 등 5개 지역의 만세운동 양상을 보고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시흥군에서는 노량진 약 300명, 영등포 약 300명, 당산리 약 150명, 양평리 약 200명, 양진리 약 300명의 군중이 참여해 만세운동을 벌였다. 일제는 영등포에서 5명, 당산리에서 4명, 양평리에서 5명, 양진리에서 2명 등 총 16명의 주모자를 체포하고 강제로 해산시키는데, 노량진에서는 단 한 명의 주모자도 체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시위대는 스스로 해산한 것으로 나온다. 동시다발 시위의 효과를 본 것으로 보인다.

경기지역 최대의 독립만세운동, 시흥군의 3·1 운동

시흥군에서는 3·23 독립만세운동 이후 4월4일까지 치열한 양상을 띠며 만세운동이 계속된다. 3월25일에는 신동면 잠실리 주민 100여명이, 26일에는 양재리 주민 200여명이 만세운동을 한다. 이어 27일 저녁에는 노온사리(광명)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소하리 사람 이정석이 헌병주재소에 구금당하는데, 아버지 이종원이 배재고보 학생 천호천과 윤의병 등의 도움을 받아 다음날 동리 사람과 인근 주민 200여명을 이끌고 노온사리 헌병주재소를 포위한 채 이정석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기도 한다.

3월29일에는 북면 구로리와 신길리에서 각각 100여명이, 안양리와 박달리에서도 각각 100여명이 만세운동에 나서고, 30일에는 영등포에서 무려 2천여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한다. 같은날 과천면 막계리와 주암리 주민들도 만세운동에 가담하고, 과천면 하리의 이복래가 주동이 돼 통문을 돌려 모인 50여명이 남태령에서 횃불시위를 한 후 읍내로 진출해 헌병주재소·우편소·보통학교 등을 돌며 횃불시위를 이어 나간다.

수암면에서는 30일 수암리 비석거리에 면내 18개 동리 2천여명이 모여 행진을 시작해 경찰관주재소·보통학교·향교 등을 돌며 만세운동을 이어 가고, 31일에는 남면 주민들이 인근 수원군 의왕면 주민들과 함께 2천여명이 군포장에 집결해 만세운동을 하는데, 일부 군중이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자 일제가 발포하기도 한다.

4월4일에도 군자면 주민 수백명이 다시 집결해 만세운동을 벌였고, 6일에는 군자면 장현리에 사는 20세 청년 권희가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비밀통고’라는 제목으로 각 동리에서 차례로 회람하도록 하다가 발각돼 일경에 구금됐다.

시흥지역 3·1 운동의 뿌리, 시흥농민봉기

시흥군에서 이렇게 독립만세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난 데에는 서울과 가깝다는 지리적 요인도 있지만, 시흥농민봉기의 전통이 그 뿌리로 자리 잡고 있었다. 시흥농민봉기는 1898년과 1904년 두 차례에 걸쳐 시흥군 일대 6개면 42개 동리의 농민 수천명이 함께 들고일어났던 항쟁이었다. 1898년의 1차 시흥농민봉기는 전임 군수 문봉오의 가렴주구와 향리들의 비리에 맞서 일어났고, 1904년의 2차 시흥농민봉기는 일본의 병참기지와 경부철도 건설을 위한 역부 강제 모집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이의 중지를 요구하면서 일어난 항일운동 성격을 띠고 있었다.

시흥농민봉기 당시 시흥군민은 1차 때는 시흥관아 진입을 자제하고 도망친 향리와 관속배들의 가옥을 파괴하고 집기를 끌어내 파손시키는 정도에서 멈췄지만, 2차 봉기에서는 일제히 돌을 던지며 관아로 돌진해 군수 박우양과 그 아들이 돌에 맞아 죽고 관아를 지키던 일본인 중에서도 사망자 2명과 부상자 4명이 생길 정도로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 두 차례 시흥농민봉기는 성우경 등 각 동리의 집강이 주모자가 돼 사발통문으로 향회(민회)를 개최해 각각 수천명의 참여를 조직했다는 점, 2차 시흥농민봉기의 경우 일제의 침략에 맞선 시흥군민의 항일의식이 강하게 표출된 사건이라는 점, 군수의 악행과 역부 모집의 부당성을 언론(1차 독립신문, 2차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을 통해 대외에 알리고자 했다는 점 등에서 근대적인 농민의식의 성장을 엿볼 수 있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실제로 3월30일 수암면 비석거리 시위에 참석한 홍순칠이 동리에서 유익렬의 하인 임학신에게서 통지를 받고 동리 허치선의 집에 모여서 30명을 인솔해 수암면 남쪽 밭에 이르렀고, “30일 자기가 참집 인원을 조사한 것은 후일 불참자를 문책할 자료를 얻기 위함이었다”고 일제 관헌 앞에서 밝힌 사실, 4월6일 군자면의 권희가 ‘비밀통고’를 돌렸다는 사실 등을 볼 때 시흥군민의 3·1 운동 참여는 1898년과 1904년의 시흥농민봉기에서 보여 준 사발통문을 통한 조직적 참여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결국 양평리의 탄원기를 비롯해 3·1 운동에 참여한 시흥군민은 자랑스러운 시흥농민봉기의 후예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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