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어김없이 5월1일이었다. 해마다 기념해 왔던 이날이었다. 올해는 129번째의 날로 기념했다. 이 나라 노동자들도 대규모 집회와 마라톤대회로 노동절 행사를 가졌다. 각기 조합원 100만명을 자랑하는 양대 노총은 대회 성명을 통해 이번에도 주요 투쟁 과제를 내세우고 정부를 상대로 해결을 촉구했다. 민주노총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사회안전망 확충, 비정규직의 완전한 철폐, 국정농단 재벌개혁 등을 과제로 내세웠고, 한국노총은 정부를 상대로 ILO 핵심협약 비준, 최저임금법 개악금지, 원·하청 간 불공정 문제 및 대기업 본사의 갑질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사회적 대화를 강조했다. 이날 나는 사무실에 들렀다가 서울광장에서 열린 민주노총 노동절 집회를 갔다. 벌써 20번도 넘게 민주노총의 노동절 행사를 봤던 터라 그런지 올해 행사가 특별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수없이 들었던 행사 노래 하나가 울려 퍼질 때만은 달랐다. 갑자기 노동의 진군 결기가 솟구쳐 밀려들었다. 연례적으로 정해진 식순에 따라 진행되는 대회 행사를 지켜보다가 문득 낡은 의식을 깨뜨려 운동을 시작하던 때의 두근거림이 되살아났다. 30년도 더 된 초록의 기억이었다. “아흔아홉 번 패배할지라도 단 한 번 승리 단 한 번 승리. 바리케이드 넘어서 넘어 마침내 노동해방.” 유명한 번안 노동가 <가자 노동해방>이었다.

2. 노래는 계속 이어졌다. “멈출 수 없는 우리의 투쟁 아무도 우릴 막을 수 없어. 노동자 자본가 사이에 결코 평화란 없다. 위대한 노동 그 억센 주먹 기계를 멈춰 열어라 역사를. 피 묻은 깃발 노동자 군대 가자! 노동해방.”

노동에 대한 세상의 폭압을 뚫고 거대한 스크럼으로 달려 나갈 기세로 부르는 노래였다. 노동해방 세상은 바리케이드 너머에 있다며 투쟁을 선동하는 노래였다. 이 나라에서 울려 퍼지는 노동가가 낯설게 들릴 때가 있다. 분명히 내 입은 따라 부르고 있건만 내 머리는 다른 세상 노래로 들린다. 요즘 들어 더 자주 그렇다. 언젠가부턴 운동은 운동이고 노래는 노래라고 들리기까지 한다. 한바탕 광장에 모여 부르고는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으로 들린다. 노래는 노래일 뿐이라고 들린다. 그러니 너머의 세상 ‘노동해방’을 위해 바리케이드를 넘어가겠다는 의지도 없이 이 나라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것으로 <가자 노동해방>이 들려야 했는데 이날은, 적어도 서울광장에서 부를 때에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도대체 이 세상 노동운동은 어떤 바리케이드를 넘어서 왔고, 무엇을 넘어가고자 하는 것일까.

3. <야넥 비시니에프스키가 쓰러졌다>는 폴란드 자유노조의 노동가였다. 레흐 바웬사가 위원장을 했던 바로 그 그단스크 조선소 노동자들이 불렀던 노래였다. “그라보벡에서, 힐로니아에서 온 젊은이들. 오늘 군대는 무기를 겨눴다. 용감한 청년들은 그에 맞서 열심히 돌을 던졌다. 야넥 비시니에프스키가 쓰러졌다.”

번안된 <가자 노동해방>보다 구체적인 노래였다. 노동자를 억압하는 권력에 맞서 싸울 것을 선동했다. “돼지 같은 놈들에, 탱크에 맞서 조선소의 젊은이들이여, 형제의 복수를 하라! (…) 노동자들에게 총을 쏜 것은 바로 정권. 야넥 비시니에프스키는 쓰러졌다.”

1970~1980년대 폴란드 노동운동은 폭압의 권력에 맞서 싸웠다. 그들에게 공산정권은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권력이었고, 그 권력의 저지선 ‘바리케이드’를 넘어선 세상을 위해 투쟁했다. 이와 같이 구체적이고 초록으로 생생했던 폴란드 노동운동의 노동가가 이 나라에서 보다 추상적인 회색의 노랫말로 번안돼 울려 퍼진 것인데도 이날 나를 흔들어 댔다.

4.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념의 색으로 편을 가르지 않고 본다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운동하는 이들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자유노조 운동의 폴란드 그단스크 조선소 노동자들과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동운동을 하는 우리 노동자들의 모습이 달라 보이지 않는다. 자본의 세상을 넘어서고자 하는 노동운동이 이상하게도 반자본의 세상에서 전개하는 노동운동과 달라 보이지 않으니 이상스럽다. 스스로 노동계급의 대표라 자임하는 사회주의 정권에 맞서는 투쟁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낡은 교과서는 노동운동으로 제대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폴란드에서처럼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노조운동으로 매도해 진압 대상이라고까지는 여기지 않는다 해도,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새로운 전개라고는 평가하지 않을 게다. 그런데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나아가기 위한 운동으로 보자면, 그 노동자 운동에서의 모습은 달라 보이지 않는다.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권력의 바리케이드를 넘어서고자 하는 몸짓은 같다.

5. 2000년께 독일 노총 초청을 받아 독일 노조를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독일노총(DGB), 금속노조(IG Metall) 등에서 만났던 노조 활동가들은 독일 체제에 관한 자부심으로 넘쳐났다. 노동자를 위한 노동정책과 사회보장제도를 자랑했다. 그 제도를 지켜 나가기 위해 노조운동은 독일국가체제 내에서 수많은 참여를 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우리의 고용노동부 관리처럼 말하고 행동하기도 했다. 민주노총 금속산업연맹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그들의 낯선 모습에 놀랐다. 당시 전투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하던 민주노총의 노조활동가들에게선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아마도 정부와 이러저러한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한국노총의 간부들이 그들의 모습과 유사하지 않을까 하고 나는 추측했다. 노동법률가로서 노동법을 공부하면서 독일노동법학자의 글을 읽을 때에도 그들에게서 같은 느낌을 받았다. 독일은 나름대로 노동이 국가권력과 사업장 질서에 참여하고 있다. 그 노동운동은 그 질서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에서는 우리 노동운동이 쟁취한 이 나라 노동자의 것보다 월등히 나아간 것인데, 노조 간부 및 활동가들에게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운동하는 이의 모습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독일노조의 간부들에게선 바리케이드를 넘어서고자 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6. 지금까지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권력을 향한 길과 노동자의 권리를 향한 길로 달려왔다. 그런데 노동자권력을 향한 노동운동의 노정은, 노동자가 쟁취한 권력이 대표의 것으로 돼 그 권력이 노동자를 지배하는 것, 권력에 대한 노동의 소외로 귀결돼 버렸다. 노동(자)을 참칭한 권력의 세상이었다. 21세기도 20년을 지나고 있는 오늘에 서서 지난 150년을 냉정하게 돌아보면, 구사회주의에서 권력을 향한 노동운동의 길은 참담한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다. 거기서 권력자는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이의 모습이 아니라, 조금 열린 세상에서 변화를 두려워하는 지배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폴란드에서 노동자들에게 총부리를 겨눈 군대를 동원한 정권의 권력자는 결코 5월1일에 노동운동을 기념해서는 안 됐다. 그들은 하지만 해마다 노동절 행사를 열어 단상의 맨 윗단에서 관제의 기념사를 했다. <야넥 비시니에프스키는 쓰러졌다>는 노래를 번안해 <가자 노동해방>을 부르는 노동운동이라면, 그들의 모습은 결코 닮아서는 안 된다고, 그들은 노동을 배신한 권력의 모습일 뿐이라고 여겨야 마땅할 것이다.

7. 노동운동은 노동자 자신의 운동이다. 노동자 대중의 운동이므로, 본질적으로 권력의 운동일 수가 없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인 권력에서 모두가 지배자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찍이 노동운동의 권력이론, 국가론은 권력의, 국가의 소멸을 말했던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권력이나 권력의 소멸을 상정하는 것은 무모해 보인다. 보다 노동자 대중을 위한 권력,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로 나아가도록 노동자는 끊임없이 요구해서 싸워야 하고, 그것이 이 세상에서 노동운동의 길일 수밖에 없다. 멈추지 않는 운동만이 노동자 대중을 깨워 ‘바리케이드 넘어서 넘어 마침내 노동해방’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고, 거기서도 다시 노동자를 다시 일으켜 앞으로 자유와 권리를 향해 나아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조금 쟁취한 공간에서의 노동권력의 바리케이드도 비판하고 넘어서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운동은 권력의 바리케이드를 넘어서기 위한 몸짓일 테니 말이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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