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최동오 선생(1892~1963).<국사편찬위원회>

사선을 넘고 살아남은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광복 후 불어닥친 분단과 전쟁 때문에 남과 북을 오고간 분들이 많다. 그 가운데 자식까지 대를 이어 북으로 가고 사돈까지 이산가족의 고통을 겪은 대표적인 경우가 최동오 선생 집안이다. 독립운동가 최동오와 그의 사돈 류동열은 6·25 때 납북(이른바 ‘모시기’ 공작)됐다. 최동오의 아들과 며느리이자 류동열의 사위와 딸인 최덕신과 류미영도 반공반북의 길을 한참 걷다가 1976년 미국으로 망명하고 86년 자진 월북했다. 두 사람 모두 북쪽의 고위직에서 일하다가 생을 마감했는데, 현재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스승 최동오와 제자 김일성

최동오와 김일성의 인연은 각별하다. 26년 15세였던 김일성이 아버지(독립운동가 김형직)를 여의고 오동진 등 아버지 동지들의 권유로 길림성 화전에 위치한 ‘화성의숙’에 입학했을 때 그 숙장이 최동오였다. 사랑하던 제자 김일성이 고루한 민족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어 화성의숙에서 중퇴하려 했다. 그러자 숙장 최동오는 대단히 노여워하면서도 “조선을 독립시키는 주의라면 나는 민족주의건, 공산주의건 상관하지 않겠네. 아무튼 꼭 성공하게”라며 격려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교정에서 선생님은 떠나는 제자를 붙들고 생활에 교훈이 될 좋은 말씀을 퍽이나 오랜 시간 많이 들려줬다. 그 어린 제자는 그날 선생님의 어깨 위에 쌓인 눈을 털어 드리지 못하고 뒤돌아선 것이 두고두고 가슴이 아팠다”고 회고했다.

최동오(崔東旿, 1892~1963)는 해주 최씨로 일명 최학원(崔學源), 호는 의산(義山)인데 1892년 6월22일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 용운리의 독실한 천도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 의주는 동학농민혁명 실패 후 탄압이 덜해 3대 교주 의암 손병희가 선교에 역점을 둔 지역이다. 일제강점기에도 교세가 유지돼 남쪽의 두 배 이상 됐고 현재도 북한 종교인 중 천도교인이 가장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더구나 최동오는 손병희의 직접 지도를 받은 제자였다. 1903년 동학에 입도했고 천도교 중앙종학원 고등사범과와 법정과를 졸업한 후 강도사로 임명돼 의주대교구의 중견으로 활동하다 3·1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감옥에 갇혀 있다가 석방됐다. 그런데 일단 교단을 정비하고 결정적 시기를 기다리자는 측과 적극적으로 독립투쟁을 계속하자는 측으로 나뉜 천도교 내부 갈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동오는 당연히 후자에 속했다.

일제의 감시와 억압으로 국내 활동이 어려워졌다. 최동오는 19년 10월 천도교 파견으로 중국 상해로 망명해 11월 임시정부 내무부 참사 및 국내 조사원, 20년 3월 내무부 지방국장으로 승진해 국내 천도교세력과의 연계를 도모했다. 또 상해와 북경에 천도교 종리원을 세우고 망명 온 천도교인들을 규합해 통일·단결을 역설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때 나중에 사돈이 되는, 독립군 맹장이자 같은 천도교인 류동열을 만나 친하게 지내며 함께 일했다. 그러나 곧이어 임정 요인들의 출신지역 갈등과 파벌, 이승만의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탁과 미주동포 지원금 독차지, 국제공산당 지원자금 좌파독식 등으로 임시정부의 통합적 기능이 퇴색되고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자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통한 창조파와 개조파 논쟁으로 이어졌다. 최동오는 창조파 입장에서 통합적이고 권위 있는 새로운 독립운동기관을 만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동북지방으로 자리를 옮긴다.

우파 위치에서 민족통일전선 추구 

최동오는 24년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에서 김동삼·현익철·김이대·김원식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했다. 25년 초 정의부 산하 화성의숙을 건립해 숙장을 맡았다. 정치·군사 간부를 육성하는 교육기관, 일종의 사관학교였다. 김일성이 26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약 6개월 화성의숙에 있을 때 최동오는 김일성을 자기 집으로 불러 밥을 먹이는 등 마치 아들 돌보듯 아꼈다고 한다. 아들 최덕신을 북경 고아원에 맡겨 놓고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29년 정의부·신민부·참의부가 불완전하게 통합된 국민부의 외교위원장을, 그 뒤 조직개편으로 독립운동사업을 전담하게 된 조선혁명당의 국제부장을 맡아 일했다. 최동오는 31년 7월2일 일제가 조중 이간책으로 조작한 만보산사건이 일어나자 길림한교만보산사건토구회(吉林韓僑萬寶山事件討究會)를 조직해 진상조사와 중국관민과의 교섭을 지휘하기도 했다.

31년 만주사변이 터지고 독립군에 대한 일제의 공격이 거세지자 이듬해 11월 관내로 이동한 최동오는 북경과 상해를 중심으로 류동열·현익철·양기탁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의 이름으로 활동을 계속했다. 35년 7월에는 김원봉·김규식 등과 좌우합작으로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해 민족혁명당을 창당했으나 애초 대동단결 노선에서 이탈하자 37년 지청천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을 재건하기도 했다. 이후 우파 중심의 한국독립당의 상무위원 겸 비서주임, 39년 11월 임시의정원 부의장, 43년 임시정부 법무부장 재임명 등 45년 8월 광복으로 귀국할 때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임시의정원 의원·외무위원 등 다양한 직책으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통일정부 수립 위한 48년 4월 남북협상 참여

일제 패망 이후 45년 11월3일 최동오는 김구·김규식 등 중경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1진으로 상해를 거쳐 김포비행장에 도착했다. 미군정의 푸대접 때문에 개인 자격으로 환국할 수밖에 없었다. 최동오는 해방공간에서도 민족대통합을 바탕으로 한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매진했다. 46년 2월 비상국민회의 부의장을 맡았고 그해 7월 좌우갈등을 극복하고 우리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통일정부를 수립하고자 좌우합작위원회의 우측위원으로 활동했다. 12월 과도입법의원이 구성됐을 때 관선의원으로 뽑혀 부의장에 선출돼 활동했다. 그러나 점차 미-소 냉전 분위기가 고조되고 미국과 이승만 세력이 유엔 감시하 남한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을 몰아가자 최동오는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48년 4월 역사적인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여했다. 당시 김일성이 옛 스승 최동오를 자택으로 초청해 식사를 대접했다고 한다.

이러한 남북협상을 통한 민족통합 노력에도 불구하고 분열·분단과 반쪽정부는 기정사실화했다. 더구나 이승만 정부의 횡포로 친일파 청산마저 좌절되자 통분을 금치 못하면서 지내는 중에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했다. 남쪽이 ‘납북’으로 부르는 북쪽의 ‘모시기 공작’으로 최동오와 류동열은 북으로 가게 됐다. 류동열은 당시 72세 고령이고 중병으로 앓아누운 상태였다. 피난길 특별 지원차량에도 그는 50년 10월18일 고향인 평북 박천과 가까운 희천에서 사돈이자 동지인 최동오의 무릎에 기대어 숨을 거뒀다. 류동열은 대한제국 육군 참령 출신으로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참모총장이었고 40년 광복군을 창설한 주역이고 광복 후에는 미 군정청 통위부장으로 국군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조선국방경비대 창설에 관여한 바 있다. 류동열 사후에도 최동오는 납북인사들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회의 간부로 활동하고 장관급 대우를 받으며 13년을 더 살다가 63년 9월16일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두 분 모두 평양 서남쪽 신미리의 애국열사릉에 모셔져 있다. 남쪽에서는 북행과 그 후 행적에 대한 냉전수구세력의 의혹 제기로 인해 류동열은 83년, 최동오는 90년에 독립운동가 서훈을 인정받았다.

아들 최덕신, 반공반북에서 연공연북으로

최동오의 아들 덕신과 류동열의 딸 미영이 37년 7월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한 달 전에 결혼했다. 14년생인 최덕신이 북경의 고아원에서 길림으로 옮겨 중학을 다니고 36년 중화민국 육군중앙학교를 우등으로 졸업 후 국민당 중앙군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그 후 국민당 군대의 영관급 장교로 복무하던 중에 광복을 맞았는데, 귀국 후 장인 류동열의 권유로 육군사관학교 특별반 3기로 입학했다. 두 달 후 소위로 임관하고 다시 소령으로 특진해 연대장과 육사 교장, 미국 포병-보병학교를 거쳐 6·25 전쟁 시기에는 3사단장으로 전투를 지휘했으며 1군단장을 거쳐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5·16 쿠데타 직후 외무부 장관을 지내고 서독 대사에 부임하던 해에 북의 아버지가 별세했다. 이처럼 최덕신은 아버지 최동오가 재북평화통일촉진회의 간부로 활동하고 있을 때도 일관되게 반공반북의 일선에서 맹활약했다.

그러던 최덕신이 서독 대사직에서 물러나 67년 천도교 교령으로 부임해 활동하는 중 76년 2월 일본·대만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고 1년반 뒤 부인 류미영도 독일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 해외 반정부 인사들로 배달민족회를 조직하고 배달신보사를 설립해 반유신 활동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 육군소장으로 예편해 말레이시아 대사를 지내고 태권도의 국제적 보급에도 크게 기여한 최홍희를 만나 북쪽의 정성스런 최동오·류동열 묘소 관리 등 기존 방북 경험을 듣기도 한다. 그 결과 최덕신은 78년 11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 과거를 불문하고 통일을 위해 손잡자는 제안을 받았다.

▲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이후 여러 차례 방북을 하다가 86년 8월 다섯 번째 방북에서 영주 귀국하게 됐다. 조선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 여러 고위직에서 활동하다가 89년 11월16일 사망했다. 최덕신 사후 류미영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천도교 중앙지도위 고문·위원장 등 고위직을 맡아 활발하게 일하다가 2016년 11월23일 향년 95세로 별세했다. 남에서 북으로 간 류미영이 2000년 8월 북측 이산가족 방문단 단장으로 다시 서울을 방문해 남쪽에 남겨진 아들과 딸들을 만난 것은 새로운 화해협력 시대의 상징적 모습이었다. 이산가족의 아픔이 독립운동가 집안의 일일 뿐이겠는가. 7천만 겨레가 자유롭게 남과 북을 오가는 시대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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