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호현 변호사(법무법인 원)

국제노동기구(ILO)는 1999년 이래 디센트 워크(decent work·좋은 일자리) 실현을 핵심목표로 삼고 있다. 디센트 워크란 지속가능한 생계를 위한 적정한 보수, 실질적인 노동 3권, 일과 가정의 양립, 개인의 성장, 공정한 취급 등이 보장되는 일자리를 말한다.

니시타니 사토시는 그의 저서 <인권으로서의 디센트 워크>(준보사·旬報社, 2011)에서 ILO가 천명한 디센트 워크란 ‘일하는 보람이 있는 인간다운 일자리’라고 해석한다. 그는 근로조건을 저하시키는 노동법 규제 완화는 (일본국) 헌법 위반의 문제라 역설하는데, 국민이 근로의 권리를 가지고(32조1항),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32조3항)는 우리 헌법 규정에 비춰 볼 때 위 주장은 한국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일하는 보람’이 있는 ‘인간다운’ 일자리란 무엇을 의미할까. 알베르 까뮈는 “노동 없는 삶은 부패하나 영혼 없는 노동은 삶을 질식시킨다”며 노동 내지 일자리는 단지 생활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보람과 사회적 승인의 원천이라는 점을 짚어 낸 바 있다. 영혼이 있는 노동이란 즐겁고 보람 있는 노동이라 해석되고 창조적이고 재량이 넓을수록, 일의 사회적 유용성이 높을수록, 업무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이 많고 빠를수록 이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인간다운’ 일자리란 인간다운 생활이 가능한 적정한 보수가 지급되고 일과 가정이 양립할 수 있도록 노동시간이 제한되며, 노동자의 개인적·집단적 의사표현이 자유로운 일자리를 의미할 것이다.

변호사는 대체로 창조적인 일을 하고(가끔은 소설도 쓴다) 언제, 어디서, 어떠한 업무를 수행할지 재량 범위가 넓다. 또한 변호사의 업무 결과는 (대체로) 사회적으로 유용하다고 평가되며, 선배·의뢰인·사회의 피드백도 빠른 편이다. 그래서 변호사의 업무 만족도는 대체로 높다.

하지만 재량 범위만큼 책임이 따르고, 책임을 다하려는 변호사의 당장 실현가능한 선택지는 더 많은 시간을 노동에 투입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변호사는 자발적 야근과 철야의 늪에 빠지고, 과로사회의 암묵적 동조자로서 지위를 굳건히 한다.

항상 맡은 사건들을 생각해야 하는 변호사 업무 특성상 식사·샤워 중에는 물론 잠들기 직전의 그 아까운 순간에도 휴대전화를 들어 메모하기도 한다. 변호사들은 이것이 바로 프로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일과 삶을 분리하지 못하고 과로사의 심해로 더욱 빠져들어 간다. 변호사뿐인가. 정보기술(IT)의 발달과 지적노동의 확대로 적잖은 노동자들이 출근길에 미리 거래처 이메일을 확인하고, 퇴근 전철에서 내일 만들 파워포인트(PPT) 자료를 구상하는 등 노동시간과 생활시간의 경계가 모호해진 지 오래다. 늦은 밤 고객이나 상사가 보낸 메신저나 이메일이 무슨 내용인지 확인하지 않을 수 없고, 최소한 “네, 확인했습니다. 감사합니다”는 회신을 보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모든 자기 시간의 주인인 노동자는 근로계약에 따라 일정한 노동‘시간’을 사용자에게 매도한다. 나머지 시간은 오롯이 노동자의 것이다. 그런데 앞서와 같이 근로계약에서 정한 노동시간의 시작시간과 종료시간이 불명확하다면, 재량이 높다는 이유로 아무리 많은 시간을 노동에 투입하더라도 근로기준법 위반이 아니라면, 노동자는 자신 삶의 주인이 아니게 된다. 즉 아무리 일이 즐겁고 보람되더라도 장시간 노동,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 노동은 인간다운 일자리, 디센트 워크가 아닌 것이다.

내년부터는 50인 이상, 내후년부터는 5인 이상 노동자를 사용하는 사업장에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상한제가 도입된다. 100인 이상을 사용하는 대형 법무법인들은 이미 노동자 대표인 변호사와 재량근로제 합의를 했거나 이를 시도했다. 재량근로제란 노동자가 사용자로부터 업무의 수행수단 및 시간 배분 등에 관해 구체적인 지시를 받지 않으며 시업 및 종업시간을 노동자 스스로 정해 일하는 제도를 말한다(근로기준법 58조3항).

원래부터 업무 시작시간과 종료시간이 모호했고, 재량만큼 높은 시간 투입(책임)이 요구됐던 변호사가 사용자와 재량근로제 합의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녁이 있는 삶, 주 52시간 근로제(대한민국은 2004년에 주 68시간 근로제 도입에 환호했다)는 변호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제도인 것인가. 노동법을 공부하는 변호사로서 고민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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