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말과 글의 세계에서 노동(labour)과 일(work)을 분리해 사고할 필요성을 자주 느낀다. 그래야 세상과 현실이 또렷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과 머리를 쓰는 것을 노동이라 할 때, 인간은 노동 없이 살아갈 수 없다. 노동은 노동력, 즉 몸의 힘과 머리의 힘을 쓸 때 이뤄진다. 노동이 그치면 인간의 삶도 그친다. 인간과 노동을 분리할 수 없다. 노동은 인간과 일체다. 반면 노동을 통해 이뤄지는 일은 인간의 외부에 분리돼 존재한다. 인간이 노동하는 동안에만 일이 인간과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인간에게 노동은 내재적 행위가 되고, 일은 외재적 행위가 된다.

일의 세계(world of work)는 세 가지 현실로 나뉜다. 첫째 자기가 하는 일을 스스로 지배하고 통제하는 사람들의 세계(자유인), 둘째 남들이 하는 일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사람들의 세계(착취자), 셋째 자기가 하는 일을 남에게 지배받고 통제당하는 사람들의 세계(피착취자)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현실은 일의 세계에서 과거·현재·미래를 관통하는 핵심 문제다. 노동을 통해 일이 이뤄진다고 할 때, 일에 대한 지배와 통제는 노동에 대한 지배와 통제로 이어진다. 노동과 인간을 현실에서 분리할 수 없기에, 결국 일에 대한 지배와 통제는 노동하는 주체인 인간에 대한 지배와 통제로 이어진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음의 질문과 대면하게 된다. 과연 노동법이 보호하려는(protect) 것은 일인가 노동인가.

국제노동기구(ILO)는 1919년 가을 미국 워싱턴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1호부터 6호까지 여섯 개의 협약을 제정했다. 제조업에서 일의 시간(hour of work)을 최대 하루 8시간과 주 48시간으로 규제한 1호 협약, 실업 방지 및 구제에 관한 2호 협약, 임신과 출산시 여성노동자 보호를 명시한 3호 협약, 여성의 밤일(night work)을 금지한 4호 협약, 14세 미만 어린이의 고용을 금지한 5호 협약, 18세 미만 청소년의 밤일을 금지한 6호 협약이 그것이다. 100년 전 ILO가 만든 최초의 여섯 개 협약에서 우리는 ‘일의 규제(regulation of work)’와 ‘노동의 보호(protection of labour)’를 꾀했던 ILO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 노동법은 어린이들의 일하는 시간을 규제하려는 시도로 19세기에 탄생했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노동시간이 아니라 일하는 시간이라 썼다. 노동법이 규제할 대상은 노동자와 붙어 있는 ‘노동’이 아니라 타인에 의한 지배와 통제의 대상으로 전락한 ‘일’이기 때문이다. 노동법은 자본가가 지배하고 통제하는 일의 세계를 규제함으로써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자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등장했다. 법제 역사 측면에서 19세기는 타인의 노동을 자본가의 재산으로 취급했던 시민법에 대한 노동법의 도전으로 얼룩져 있다. 이는 노동자를 기계보다 못하게 취급했던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투쟁과 맞닿아 있다. 이런 이유로 매일노동뉴스가 ILO 100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필라델피아 정신>의 저자 알랭 쉬피오는 노동법의 역사적 임무를 두고 노동을 사물이 아니라 인격(person)으로 대접하는 것이라 주장한 것이다.

1차 대전 이후의 세계를 그리던 ILO는 1919년 창립헌장에서 자기 목표를 “사회정의를 통한 항구적 평화의 실현”으로 천명했고, 2차 대전 이후의 세계를 그리던 ILO는 1944년 필라델피아 총회에서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고 선언했다. 이는 노동을 보호하고 일을 규제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는 과제였다.

노동을 보호한다는 것은 노동하는 노동력의 담지자인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을 뜻한다. 일을 규제한다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에 대한 지배권과 통제권을 행사하는 사용자를 규제하는 것을 뜻한다.

이상태로서의 노동법은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인데, 현실태로서의 노동법이 일(사용자)을 보호하는 사례를 우리는 자주 접한다. 노동법이 노동(노동자)을 규제하고 일을 보호하는 전도된 현실은 노동을 인격이 아니라 사물로 전락시켜 ‘인간의 사물화’를 초래한다. 이는 ‘인적 자원’ 혹은 ‘인적 자본’이라는 이데올로기와 밀접하게 연결되는데 <필라델피아 정신> 저자 알랭 쉬피오에 따르면 인적 자원은 나치의 어휘고, 인적 자본은 스탈린의 어휘였다. 인간을 자원이나 자본으로 간주할 때, 자연자원을 ‘개발’하듯이 인간에 대한 ‘착취’도 가능해진다. 이때의 개발과 착취는 영어로 ‘exploit’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된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노동 문제를 다루는 위원회의 수장이 “기업할 권리” 운운하며 재산의 권리를 인간의 권리보다 앞세우는 작태를 보인다. ‘기업할 권리’ 뒤에 숨어 ‘자본가할 권리’를 강화하려는 속내다.

이탈리아 법률가 루이기 멘고니는 “사실상 노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노동하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사용자와의 관계에서 노동자는 인격과 구분되는 요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 자체를 제공한다. 노동자는 자신이 가진 것을 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건다”고 주장했다.

자본가가 노동을 사물로, 노동자를 재산으로 취급하도록 허용하는 권리는 폐지해야 한다. 그 첫 작업은 일의 세계에서 노동의 세계를 분리해 내어 노동의 세계를 복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일과 노동의 개념적 차이를 부각시켜 현실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보호하려는 것은 노동이지 일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일로 인해 노동의 자유로운 행사가 억제된다면 일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노동은 적절한 보호를 받아야 하며 이는 사용자가 지배하고 통제하는 일에 적절한 규제가 가해지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규제해야 할 것은 일이지 노동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과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노동을 자유롭게 즐길 권리가 있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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