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9월 방한해 노사정 대표들과 함께한 가이 라이더 ILO 사무총장. 정부가 이때 ILO 핵심협약 비준을 강하게 추진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정기훈 기자>

2017년 9월, 11년 만에 한국을 찾은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과 ILO 핵심협약 비준을 공약했던 대통령이 만났다.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과 가이 라이더 사무총장이 국제노동기준에 맞게 국내 노동법을 정비하는 문제는 사회적 대화를 통해 양보와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고 밝혔다. 가이 라이더 사무총장은 이틀 뒤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가 ILO 핵심협약 비준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다”며 면담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1991년 ILO에 가입한 한국은 ILO 핵심협약 8개 중 단결권·단체교섭권 관련 87호·98호와 강제노동에 관한 29호·105호 등 4개 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

정부가 미비준 핵심협약을 비준할 것이라는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ILO 100주년이 되는 2019년 6월까지 비준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됐다.

그로부터 1년8개월이 지난 지금, 기대는 실망과 우려로 바뀌고 있다. 9개월간 이어진 노사정 대화는 사실상 결렬됐다. 한국·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상 ILO 협약 비준 노력의무 위반에 따른 국제적 망신과 유·무형적 피해까지 예상된다.

“20대 국회에서는 핵심협약 비준이 어렵다”는 전망부터 “이 정부에서는 불가능해 보인다”는 비관론까지 나온다. 6월 ILO 100주년 총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기조연설을 하는 그림을 그렸던 정부 계획은 물거품이 돼 가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절호의 기회 날린 2017년
“선 입법 방식, 처음부터 불가능”


문재인 대통령이 가이 라이더 사무총장을 만난 2017년 9월4일로 돌아가 보자.

청와대 발표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국내법 개정을 위한 사회적 대화”를 강조했다. 사회적 대화를 통한 노사정 합의, 그리고 국내법 개정 뒤 비준을 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2006년 이후 한국을 처음 방문한 ILO 사무총장과 만나는 자리에서 나올 것으로 기대됐던 것보다 수위가 낮은 게 사실이었다. 문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ILO 핵심협약 비준을 공약하고, 국정과제에 이를 포함하자 국내에서는 “비준을 먼저 할 것이냐, 입법을 먼저 할 것이냐” 논쟁이 일었다.

그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역대 정부와 마찬가지로 ‘선 입법 후 비준’ 방식에 힘을 실은 것이다. 정부는 “ILO 핵심협약과 관련한 노사정 합의는 불가능하다. 정부가 먼저 비준해야 한다”는 주장을 애써 외면한 채 사회적 대화를 추진했다.

정부의 이런 입장은 2017년 대선 당시 더불어민주당 공약과 차이가 있다. 공약집에는 “ILO 핵심협약 중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 협약(87호), 단결권 및 단체교섭 협약(98호), 강제노동 협약(29호), 강제노동 철폐 협약(105호) 비준”에 이어 “ILO 핵심협약 비준에 따른 국내법 개정”이라고 나와 있다. 정부가 먼저 핵심협약을 비준한 뒤 국내법을 개정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집권하고 나서 선 비준 방식은 어렵다고 판단한 것일까. 문재인 정부는 불과 몇 개월 만에 ‘선 입법 후 비준’으로 방향을 틀었다.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정부가 ILO 핵심협약 비준을 사회적 대화로 추진하려 했던 이때를 “골든타임을 놓친 시기”로 보고 있다. 새 정부가 막 집권해 국민 지지가 강할 때, ILO 사무총장이 방한해 대통령을 만난 이때에 선 입법이나 사회적 대화가 아닌 ‘선 비준’을 밀어붙였어야 했다는 얘기다. 한 노동법학자는 “비준하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2017년 5월 당선되자마자 비준을 추진해야 했다. 그때가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며 “기본적으로 선 입법 후 비준은 불가능했다”고 평가했다.

사회적 합의나 대화에 취약한 우리나라 노사관계 특성상 가뜩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한 노동기본권 문제를 노사정 대화 틀에서 합의하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웠다는 얘기다. 윤효원 인더스트리올 컨설턴트는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가이 라이더 사무총장을 만난 직후가 (핵심협약을 비준할) 최고 타이밍이었다”며 “2017년 12월, 늦어도 2018년 지방선거 때까지가 골든타임이었는데 아쉽다”고 말했다.

ILO 핵심협약 비준에 관한 제도개선을 논의하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가 발족한 것은 지난해 7월이었다. 정부는 집권 1년2개월이나 지난 시점에 실패가 예견된 '경사노위 사회적 대화 또는 합의→국회 노동관계법 개정' 방식을 추진했다. 노사 간 사회적 대화 경험과 신뢰가 부족하고, 합의는 더더욱 쉽지 않으며, 국회 법개정이 난망한 상황에서 한가하게 사회적 대화를 통한 '선 입법 후 비준'만 되뇐 셈이다. 윤효원 컨설턴트는 "대통령이 먼저 비준을 해야 한다"며 "가장 기본이 되는 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를 사회적 대화로 풀려는 것은 터도 안 닦고 집 짓는 격"이라고 꼬집었다.

 

한·EU 무역분쟁 후폭풍 눈앞에
“이 정부에서는 어렵다”는 전망까지


최근 상황을 보자. 경사노위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는 이달 12일 ILO 핵심협약 비준 관련 제도개선 방안에 대한 9개월 논의를 마무리했다. 사실상 결렬이었다.

경사노위는 한 달 정도 시간을 갖고 부대표급 또는 대표급 회담을 이어 갈 계획이다. 6월로 예정된 ILO 총회 일정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내부 상황은 좋지 않다. 올해 2월 도출된 탄력근로제 관련 노사정 합의가 경사노위 본위원회에서 의결되지 않고 있는 것에 반발한 한국노총이 사회적 대화 중단을 선언할 수 있다. 노사정 대화를 이어 간다 해도 합의에 이를 가능성은 낮다.

외부 상황도 여의치 않다. 한·EU FTA에서 약속한 ILO 협약 비준 노력의무 이행을 요구하고 있는 EU측은 조만간 무역분쟁 해결절차 마지막 단계인 전문가패널 소집을 요청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달 9일 김학용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을 방문한 세실리아 말름스트룀 EU 집행위원회 통상담당 집행위원은 “여름 전에 ILO 핵심협약을 비준할 수 있냐”고 물었다. 6월 ILO 100주년 총회를 감안한 것일 수도 있지만 다음달 23~26일 EU 의회선거를 염두에 둔 질문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EU 의회는 한국 정부가 ILO 협약 비준 노력의무 조항을 불이행하고 있다며 집행위를 압박해 왔다. 선거가 끝나고 의회가 정비되는 6월이면 압박이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 이승욱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EU 집행위가 6월 전 비준 가능성을 물어본 것은 우리나라 사정을 봐준 게 아니라 자기네들 사정을 생각한 것”이라며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ILO 핵심협약 비준이 벽에 막히면서 “이 정부에서는 하기 어렵다”는 비관론이 제기된다. 2017년 5월 집권한 뒤 1년여간의 골든타임을 놓쳐 버렸기 때문이다.

노동계에서는 정부 결단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노동계와 일부 전문가들이 말하는 결단은 '선 비준 후 입법'이다.
 

▲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과 산별연맹 대표자들이 지난 4월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회관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비준동의안 처리도 수개월
마지막 기회는 있나


정부 내부에서는 기류변화도 감지된다. 고용노동부가 이달 17일 ‘ILO 핵심협약 비준 관련 설명’ 보도자료를 발표하고나서다. 노동계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선 비준 방식에 관한 설명자료였다. 노동부는 국회 비준동의 없이 대통령이 재가하는 방식과 국회 비준동의를 거쳐 비준한 뒤 관련법을 개정을 하는 방식으로 분류했다.

노동부는 국회 비준동의를 거쳐야 위헌소지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 이 방식을 염두에 둔 것으로 판단된다. 노동법 일부 전문가들은 "노사정 대화를 최대한 진행했다는 명분을 쌓은 뒤 정부가 국회 동의안과 정부 법개정안을 준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더불어민주당 환노위 간사인 한정애 의원은 최근 “국회 비준동의”를 야당에 제안했다.

그런데 정부가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보내고 국회가 동의를 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노동부는 “관계부처 협의와 법제처 검토, 국무회의, 노사단체 의견 수렴을 감안하면 최소 3~4개월이 걸린다”고 전했다.

우리나라는 91년 ILO에 가입한 뒤 27개 협약을 비준했다. 이 중 2개 협약은 법개정이 필요한데도 국회 비준동의를 먼저 받았다. 8개 핵심협약 중 하나인 취업의 연령에 관한 협약(138호)과 해사노동협약이다.

138호 협약이 비준된 과정을 보면 98년 11월2일 외교통상부 장관이 국무회의에 비준안 안건을 상정했고, 같은해 12월17일 국회 본회의에서 비준동의안이 처리됐다. 이듬해 1월28일 ILO에 비준서를 등록했다. 3개월 가까이 걸렸다. 노동부 관계자는 “해사노동협약 비준은 해양수산부에서 추진했는데, 5~6개월 소요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국회 비준동의까지 수개월이 걸린다면 6월 ILO 총회 전에 비준은 불가능하다. 국회가 사실상 내년 총선국면에 돌입한 만큼 20대 국회에서 처리하기도 쉽지 않다. 다만 한·EU 무역분쟁 해결에 도움이 될 수는 있다. 이승욱 교수는 “국회가 비준동의를 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정부가 비준동의안을 제출했다는 자체가 ILO 핵심협약 비준 노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 민주노총 소속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지난 4월1일 오전 청와대 앞에서 ILO핵심협약 비준과 노조법 2조 개정, 특고노동자 2019 투쟁 선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문제는 정부가 국회에 비준동의안을 제출한다고 해서 협약 비준에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최근 선거제도 개혁 등에 대한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 상정과 관련한 여야 갈등을 보면 더욱 그렇다.

“대통령이 국회 동의 없이 먼저 비준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 배경이다.

“ILO 핵심협약은 보편적인 국제노동기준으로 노동자가 정당하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존중받는 사회, ILO 핵심협약 비준으로 노사정이 함께 만들겠습니다.”

정부세종청사 노동부에 전화하면 나오는 안내멘트다. 정부는 쏟아지는 비관론을 뚫고 28년 만에 찾아온 기회를 실현할 복안이 있는 것일까. 아니, 의지는 있는 것일까.

대통령 비준과 국회 동의, 어느 쪽이 먼저일까

정부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해 국회 비준동의안 카드를 만지작거리면서 '선 비준' 방식에 대한 논쟁이 불붙고 있다.

노동계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선 비준 후 입법’ 방식은 두 가지다. 우선 대통령이 비준을 한 뒤 국회 동의를 받거나 관련법 개정을 하면 된다는 의견이다. 다른 하나는 국회 동의를 받고 나서 대통령이 비준해야 한다는 논리다.

논쟁은 헌법해석 차이에서 발생한다. 법학자나 법률전문가들은 물론이고 노동운동 진영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헌법 60조는 입법이 필요한 조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국회 동의권을, 73조는 대통령의 조약 체결·비준권을 명시하고 있다. 대통령 비준을 강조하는 쪽은 대통령 비준권과 국회 동의권을 별개 문제로 본다. 대통령은 비준만 하면 되고, 국회는 동의 여부만 결정하면 된다는 뜻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쪽은 자유한국당이 ILO 핵심협약 비준에 반발하는 현실에 주목한다. 대통령이 먼저 비준한 뒤 국회에 동의 혹은 법개정을 압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렇지 않으면 ILO 핵심협약 비준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인식이 깔려 있다.

국회 동의를 먼저 받아야 한다는 쪽은 국회 동의 없는 비준은 효력이 없다는 입장이다. 국회 동의를 받지 않고 비준할 경우 헌법과 충돌한다고 우려한다. 대통령이 협약을 비준하더라도 보수야당이 국내법 개정에 반대하는 상황을 염두에 둔다. 국회 동의를 받아 놓고 정부가 비준해야 ILO 핵심협약이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강제노동협약 비준 논의는 ‘깜깜이’

“사회복무요원, 전·의경, 의무소방 등의 비군사업무 수행 제도는 ILO(국제노동기구) 협약 중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 29호 및 105호를 위반한 협약이며 강제노동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중략) 병무청은 사회복무요원 제도의 폐지를 검토하기는커녕 ILO로부터 사회복무요원제도의 강제노동 예외적용 인정을 받겠다는 뻔뻔한 소리를 해 대며 협약 비준을 지연시키고 있습니다. (중략) 민주노총이 국제노동기구 협약 29호 및 105호 비준 강조, 그리고 사회복무요원 제도 폐지를 공론화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최근 한 공익근무요원이 민주노총 관계자에게 보낸 이메일 내용이다. 우리나라가 비준하지 않은 ILO 핵심협약은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87호)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원칙 적용에 관한 협약(98호)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29호)과 △강제노동 폐지에 관한 협약(105호)이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가 지난해 7월부터 이달 12일까지 논의한 것은 87호 협약과 98호 협약에 관한 것이다. 강제노동 관련 핵심협약(29호·105호) 비준 논의는 쟁점화하지 않고 있다.

정부는 87호·98호 협약과 달리 강제노동 관련 협약 비준은 정부부처 간 협의로 처리하겠다는 계획이다. 노사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지 않아 정부협의로 비준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정부가 운영하는 제도상 문제라서 관계부처 협의로 강제노동 관련 협약 비준 문제를 풀려고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처협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정부 해명처럼 부처 간 협의로 풀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ILO 29호 협약에 따르면 우리나라 공익근무요원제도는 강제노동에 해당한다. 산업기능요원도 마찬가지다. 현재 법무부와 국방부·중소벤처기업부가 대체복무제도 개선에 반대하면서 진통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05호 협약은 노동권 문제와 관련이 있다. 파업을 제재하기 위한 강제노동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법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노동자가 교도소에서 노역을 하면 강제노동에 해당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6년 불법파업에 대한 벌칙규정을 명시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에서 징역형 삭제를 권고했다. 그런데 노동부는 권고를 이행할 계획이 없어 보인다. 노동부 관계자는 “불법파업으로 징역을 선고받아도 노역을 부과하는 사례는 거의 없고, 노역을 부과해도 수감자 동의를 받도록 돼 있다”며 “징역형 자체가 아니라 노역이 문제인 만큼 ILO 회원국 사정에 맞게 조치를 취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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