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훈 여행작가

여행을 하다 보면 낯선 문양이나 깃발·상징 같은 것들에 갑자기 꽂힐 때가 있다. 때로는 별것 아닌 걸로 여기고 무심히 지나쳤다가 나중에 가서야 숨겨졌던 비범함을 알아채고는 호들갑을 떨 때도 있다. 내게는 볼리비아의 위팔라와 네팔의 룽타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볼리비아에서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일곱 개의 색이 하얀색을 가운데 두고, 가로 세로 7칸씩 대칭으로 들어간 문양을 한 깃발의 정체를. 볼리비아를 빠져나와 칠레의 북단 산 페드로 아타카마에 도착해 하루 묵은 호스텔 ‘마틸다’의 벽에 그려진 그저 예쁜 문양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달의 계곡 투어를 다녀온 친구가 전해 준 이야기를 듣고서야 이 문양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게 됐다. 현지 가이드 청년이 흥분과 열정에 가득 차 설명했던 잉카 후예들의 자긍심과 남아메리카 땅의 진짜 주인이 자신들임을 선언하는 연대의 상징 ‘위팔라’가 바로 호스텔 벽에 그려진 그 문양일 줄이야. 혹시나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 싶어 호스텔 카운터를 지키는 총각에게 물었더니, 어라? 점심을 챙겨 먹던 이 친구 눈빛이 살짝 변한다. 그러더니 우리에게 위팔라의 정확한 영문명까지 써 주면서 위팔라는 볼리비아에서 시작돼 페루·칠레를 비롯한 남미 여러 나라의 잉카 후예들이 국적을 넘어 맺은 연대의 상징이라며 달뜬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 간다. 어허, 이거 이 정도면 범상치 않은데 하는 생각이 퍼뜩 든다. 꽤나 많은 남미 젊은이들이 위팔라로 정서적 연대감을 키워 내고 있을지 모른다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아직 그 정도로 대세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과소평가할 것도 아니었다.

남미 최초로 원주민 출신 대통령이 된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대통령은 위팔라를 볼리비아 공동 국기로 지정하기도 했다니, 위팔라는 어쩌면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깃발일지도 모를 일이다. 무지개 색깔에서 남색 대신 시간을 뜻하는 하얀색이 들어가 ‘빨주노하초파보’로 이뤄진 문양인 위팔라를 벽에 그려진 흔한 그래피티로만 알고 넘어갈 뻔했다니. 진짜 딱 아는 만큼만 보이고, 궁금한 만큼만 채워지는구나 싶다. 오지랖 넓은 친구 녀석의 호기심 덕에 오늘 남미 여행이 조금 더 깊어졌다.

네팔의 포카라 거리 곳곳에는 다섯 가지 색깔(푸른색·붉은색·초록색·노란색·하얀색)의 깃발이 휘날린다. 식당에도, 가게에도, 등산로 여기저기에도 언뜻 보면 만국기처럼 붙어 있던 이 오색 종이의 이름은 ‘룽타’. 알아볼 수 없는 자그마한 글씨들이 색색의 종이 위에 적혀 있어 뭔가 했는데 불교 경전을 적어 둔 것이란다. 룽타의 말뜻은 ‘바람의 말(馬)’. 부처님 말씀이 적힌 룽타가 바람에 흩날리면 그 위에 적힌 말씀이 ‘하늘을 나는 말’이 돼 세상 구석구석까지 날아가 그 뜻이 이뤄지리라는 믿음이 담겨 있다.

룽타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모르긴 해도 어려운 경전 앞에서 주저하게 될 이들에게 한 발 더 다가가 일상 속에서 믿음을 만들어 보려는 낮은 마음의 산물 아닐는지. 그 옛날 재기 발랄했던 젊은 승려 하나가 불경이 적힌 깃발이라는 기깔나는 아이디어를 냈고, 시간과 함께 민초들 삶 곳곳으로 이렇게 퍼져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힘들게 경전을 외울 일 없이 지나가며 돌리면서 기도할 수 있게 만든 ‘마니차(안으로는 불경을 담고, 밖으로는 불경을 새긴 종)’를 보고 신박하다 생각했는데 ‘룽타’ 역시 못지않게 신박하고 그 마음이 따뜻하다. 룽타는 그저 글을 못 읽는 민초들을 위한 계몽의 도구가 아니다. 룽타를 거는 사람은 누구나 부처님 말씀을 바람 따라 전하는 수행자가 되게 만들어 주는 행동의 도구다. 부처를 믿는 이라면 누구나 매일의 삶 속에서 불경 설파를 실천할 수 있게 해 주는 마법의 말. 룽타의 진짜 멋은 여기에 있다. 게다가 룽타의 빛이 바랠수록, 마니차의 새김 경전이 닳을수록 부처님 말씀이 세상 깊숙이 나아간 셈이니 애써 새것으로 자주 갈아 줄 필요도 없다. 이 얼마나 지속가능한 친환경 종교 생활인가!

무릇 모든 상징과 체험을 대하는 여행자의 자세는 이렇게 어느 정도는 감정 과잉상태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여행글을 읽을 때는 본래의 의미에다가 뇌피셜을 덧붙여 여행의 추억으로 살짝 더 크게 포장하는 ‘여행자 덤’을 감안해야 한다. 꼭!

여행작가 (ecocjh@naver.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