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이동휘(1873~1935) 선생. <국사편찬위원회>

이동휘는 우리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 지도자다. 식민과 분단 100년 동안 편향된 이념의 잣대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를 재단했기 때문이다. 호탕하고 열렬했으며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이동휘는 구한말 군인 출신으로 애국계몽과 의병운동을 이끌었다. 독실한 기독교 전도사로, 다시 열렬한 민족적 사회주의자로 불같이 살다가 시베리아 눈보라에 쓰러진 걸출한 독립운동 지도자다. 1919년 연해주에서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맡고 좌우통합정부를 지향한 이동휘에게는 상해파 고려공산당 대표로서 국제공산당 지원자금 좌파독식사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의 갈등으로부터 시작된 자유시 참변의 정치적 책임도 따른다. 그러나 공은 공, 과는 과. 평생 독립운동에 매진한 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공정하고 엄정해야 한다.

이동휘는 1873년 6월20일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아전을 지낸 빈농 이승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주선으로 18세 때 군청의 심부름꾼인 통인(通引)으로 일하다가 군수의 부패와 탐학에 분개해 화로를 뒤집어씌우고 도피생활을 했다. 당시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나중에 탁지부대신을 지냈고 보성전문 설립자였던 이용익의 추천으로 1896년 한성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해 1899년 졸업했다. 궁성수비대에서 근무하다가 1901년 참령으로 승진해 삼남검사관(三南檢査官)으로서 지방의 부정부패 장교와 관리를 엄격하게 처벌해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1903년 5월 국방 요충지인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부임해 도민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윤명삼·유경근 등과 강화도 신식교육기관인 보창학교를 설립·운영하고, 1906년 신채호의 〈가정잡지〉 발행과 한북흥학회·서북학회 등 애국계몽활동에 참여했다. 1907년 비밀결사 신민회 결성에 참여해 함경도방면 책임자가 됐으나 1911년 보안법 위반으로 구검됐다.

애국군인에서 기독교 전도사로

1907년 일제가 조선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자 강화도 진위대 김종수·연기우 등과 군민들이 봉기했는데, 이동휘는 배후조종자로 일제 경무총감부에 체포돼 4개월 후 석방됐다. 1909년에는 전도사로서 함경도 일대에서 기독교 전파와 민족계몽운동을 했는데, 북간도 교육단을 만들어 정재면을 용정으로 파견, 명동학교를 개척하도록 했다. 1910년 8월 초 일제에 예비검속돼 경술국치 선포 이후에야 석방됐다. 1911년 1월 말부터 2월 초순까지 북간도 각지의 교회를 순방하며 부흥회를 열고 계봉우·오영선·장기영·김하구 등 30여명을 중심으로 항일비밀결사 ‘광복단’을 조직했다. 귀국 후 그해 3월 안명근·양기탁 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일제에 체포돼 인천 앞바다 대무의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1912년 6월 풀려났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항일구국운동이 어려워 1913년 2월 북간도 용정 명동촌으로 망명했다. 한인자치기구 ‘간민회’를 지도하고 신교육 보급, 기독교 전파, 동포의 단결과 민족의식 고취에 매진했다.

이동휘는 1913년 10월 일제의 위협이 미치는 북간도를 떠나 훈춘을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했다. 당시 연해주 한인사회도 출신지역 간 파쟁으로 한인사회 대표기관인 권업회(勸業會)가 침체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동휘는 명실상부한 통합자치단체로 재건되도록 권업회 총대로서 연해주 각지를 순방하며 조직 정비와 한인사회 단합을 위해 활동했다. 1914년 만주와 연해주에 분산된 운동세력과 무장력을 총결집해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 독립자금 모금을 위한 ‘애국저금단’에 이어 장교 양성을 위한 북간도 왕청현 나자구 ‘무관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으로 러일동맹이 형성되면서 광복전쟁계획은 정지되고 일제의 강압으로 러시아 정부는 이동휘 등 36명의 한인 지도자들을 체포·추방했다. 다시 북간도로 이동해 일본의 대중국 21개조 강요와 대결 분위기에서 중국과의 연합을 통한 대일 전쟁을 계획했으나, 1915년 5월 원세개의 굴복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아시아 최초 사회주의정당, 한인사회당 대표

1917년 3월 러시아 1차 혁명 소식을 듣고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자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찾았는데, 제정 러시아로부터 독일간첩 혐의로 체포됐다. 1917년 10월 혁명 후 김 알렉산드라와 볼셰비키의 도움으로 석방됐다. 10월 혁명에 고무된 이동휘는 러시아혁명에 대한 옹호와 협조가 곧 조선독립의 길이라 굳게 믿고 1918년 5월13일 김립·유동렬 등 러시아에 귀화하지 않은 한인들, 그리고 김 알렉산드라·오하묵 등 귀화한 한인들과 함께 아시아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한인사회당은 기관지 발행, 군사학교 설립, 일본군 상대 반제반전선전, 한인적위대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1918년 6월 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전로한인총회에서 최재형과 함께 명예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00여명의 한인적위대는 1918년 6월 체코군 봉기와 8월 일본·미국·영국·프랑스 등 연합국의 무력 개입으로 백위군 정권이 들어서자 러시아 적위군과 함께 우수리전투를 벌였다. 국권 상실 후 최초의 한인 무장투쟁이었지만 반수 이상의 희생자를 내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으며 한인사회당은 불법화되고 이동휘도 북만주 오지로 피하게 됐다.

1919년 3·1 운동 이후 국내외에 여러 임시정부가 구성됐다. 이동휘는 경성독립단정부에서 집정관, 신한민국정부에서 집정관, 한성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에서 선전부장, 상해 임시정부에서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로 추대됐으나 어느 직책도 수락하지 않았다. 자리가 아니라 활동이 중요하다는 일념에서였다. 1919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군부를 조직해 장정모집과 군사훈련을 하다가 8월 상해 임시정부가 연해주 대한국민의회·국내 한성정부와의 통합에 합의하자 상해로 건너가 국무총리를 맡았다.

상해 임시정부는 좌우통합의 모양을 갖추고 권위를 갖게 됐다. 하지만 이승만이 구미위원부를 설립하고 미주지역 독립운동 자금을 독식하고 국제연맹 위임통치를 청탁함으로써 재정난과 노선갈등에 빠졌다. 1920년 초부터 8월까지 이동휘 주도로 이승만 불신임운동을 전개하지만 안창호 등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국제공산당이 상해 임시정부에 200만루블을 원조하기로 하고 1차로 40만루블을 보내왔으나 임시정부의 '통합' 정부 성격이 퇴색되고 한인사회당 세력이 이 자금을 독식하면서 좌우갈등이 깊어졌다.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와 국제공산당 지원자금 사건

한편 일제는 3·1 운동 후 급속히 성장한 연해주와 간도의 한인 독립운동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에 나섰다. 1920년 연해주의 4월 참변에 이어 그해 10~11월 간도일대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경신대참변을 일으켰다. 그런데도 분열갈등에 휩싸인 상해 임시정부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1921년 1월24일 이동휘의 사퇴에 이어 김규식·안창호·유동렬·남형우 등의 사퇴로 통합 임시정부는 이제 일개 독립운동단체로 전락했다.

1919년 말 러시아 내전에서 반혁명세력인 백위파가 몰락하자 혁명세력인 볼셰비키 정부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국내외 한인 공산당 조직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기 시작했다. 이들을 지도할 중앙조직의 필요성에서 이동휘는 1920년 봄 국제공산당이 파견한 대한국민의회 부회장 출신 김만겸과 박진순·김립·이한영 등의 한인사회당 간부들, 여운형·조완구·신채호·김두봉 등의 임시정부 관계자들을 망라해 상해 공산주의 그룹을 결성했다. 이것이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으로 명칭이 변경됐고 비슷한 시기 이르쿠츠크에서도 고려공산당이 결성됐다.

그해 6월28일 일제하 독립운동사 최대 비극이 발생했다. 러시아 영내에서 독립군의 무장해제, 지휘권 회수를 요구하는 적위군과 이에 순응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계열 독립군이 이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상해파 고려공산당 계열 독립군을 무참하게 진압해 수백 명이 죽고 다치고 실종되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것이다.

자유시 참변의 상처와 책임에도 끝까지 투쟁

홍범도·김좌진·최진동 등이 이끈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와 10월 청산리대첩에서 대승을 거둔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 대병력의 추격을 피해 중러 접경지대 밀산에 집결해 3천여명의 대한독립군단을 편성하고 러시아 아무르주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이동했다.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만주 항일무장투쟁을 벌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원대한 독립투쟁의 꿈은 자유시 참변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적위군이 내전 중에 외부무력을 쉽게 허용할 수는 없었을 것임이 이해된다. 최후의 결단에서 볼셰비키혁명을 우선시하는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손을 들어줬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려공산당의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이견과 갈등을 조정해 통일단결을 이뤘더라면 레닌의 식민지-반식민지 약소민족 해방투쟁 지원 테제에 따라 소비에트 중앙정부와의 교섭으로 1920년대 독립운동의 최대 비극을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다고 본다.

▲ 양재덕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 이사장

이동휘는 상해파 고려공산당 대표로서 자유시 참변의 상처와 책임으로 괴로웠겠지만, 좌절하지 않고 계속 투쟁했다. 1923년 말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조직된 ‘적기단’을 지도하고 이후 국내 조선공산당 활동을 간접적으로 후원했다. 1930년 연해주의 모플(MOPR·국제혁명가후원회) 위원으로 고통받는 혁명가와 그 가족들을 후원하기 위한 모금과 선전을 전개했다.

항구·탄광 등 여러 곳 한인들을 찾아다니며 모금과 홍보를 전개하던 이동휘 선생은 시베리아의 눈보라 속에서 독감에 걸려 1935년 1월31일(향년 62세) 서거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사회주의 활동을 이유로 독립운동 유공자에서 제외시키다가 1995년 김영삼 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대자유(大自由)는 이동휘의 호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