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위원장 박수근)가 15일 오후 서울 새문안로 경사노위 회의실에서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관련 공익위원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방안을 논의 중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 공익위원들이 재계 요구인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과 "파업시 사업장 점거 제한", 노동계 요구인 "복수노조 사업장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개선"을 담은 안을 내놓았다. 노사 요구를 일부 수용해 결렬된 노사정 협상 불씨를 살려 보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노동계와 재계가 공익위원안에 부정적이어서 협상 재개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단협 유효기간 3년으로
직장점거 파업 제한
창구단일화 일부 개선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 위원장인 박수근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공익위원들은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사노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ILO 기본협약 비준을 위한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방향에 대한 공익위원 입장’을 발표했다.

공익위원들은 지난해 11월 단결권 관련 합의안을 발표했다. ILO 핵심협약인 87호(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와 98호(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원칙 적용에 관한 협약) 비준에 필요한 내용이었다.

공익위원들은 이날 단결권 관련 합의안에 더해 단체교섭·쟁의행위 부분을 추가했다. 먼저 재계 요구인 단협 유효기간을 현행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파업시 사업장 점거와 관련해서는 “사용자 점유를 배제하고 조업을 방해하거나, 그 쟁의행위와 관계없는 자 또는 근로를 제공하고자 하는 자의 출입·조업 기타 정상적인 업무를 저해하는 경우에는 이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정비하라”고 주문했다. 재계가 요구한 파업시 대체근로 금지에 대해서는 “위헌 소지가 있는 점, 국제노동기준 위반 가능성이 큰 점”을 이유로 현행제도 유지를 권고했다.

재계의 또 다른 요구인 부당노동행위 처벌조항 폐지는 장기 과제로 설정했다.

공익위원들은 “노사 간 갈등이 불필요하게 사회적으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고 자기책임을 원칙으로 하는 자율적 노사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강제노동에 관한 ILO 기본협약의 취지와 내용을 고려하면서 업무방해죄·부당노동행위 처벌조항을 포함한 노동관계법 처벌규정을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전체적으로 정비해야 한다”고 밝혔다. 부당노동행위 형사처벌 폐지를 논의하려면 노동계가 요구하는 파업에 대한 업무방해죄 적용 금지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는 논리다. 강제노동을 금지하는 ILO 핵심협약인 105호(강제노동 폐지 협약) 비준도 논의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공익위원들은 노동계 요구를 일부 받아들여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개선방안도 제시했다. 주요 내용은 △사용자가 임의로 교섭상대방을 정하도록 한 개별교섭 동의방식 개선 △교섭단위 통합제도 신설 △기업별 교섭구조 중심인 현 제도를 초기업별 교섭을 포함해 다양화하는 장치 도입이다.

노사 단체 공익안에 반발
“경사노위 재협상 의미 없다”


당초 공익위원들은 ILO 핵심협약 비준과 무관한 단체교섭·쟁의행위에 관한 입장을 발표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달 들어 네 차례 진행된 노사정 부대표급 협상이 결렬됐다. 공익위원들은 “우리나라 노사관계의 미래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공익위원안을 기초로 대승적인 차원에서 노사정 대타협을 재차 시도할 것을 간곡하게 호소한다”고 입을 모았다. 박수근 교수는 “구체적인 안이 나왔으니 노사정 대표급에서 논의해 보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사 단체는 반발했다. 한국노총은 “공익위원안을 인정할 수 없다”며 “ILO 핵심협약 비준과 관련 없는 단협 유효기간 연장과 파업시 직장점거 금지 등 사용자단체 요구사항을 일부 수용한 안은 기존 제도를 후퇴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협상재개 가능성에 대해 “다시 논의한다고 해서 뭐가 바뀌겠냐”며 “정부는 더 이상 책임을 미루거나 방기하지 말고 하루속히 '선 비준 후 입법' 조치에 착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민주노총은 “(공익위원안이) 한국경총의 노조 공격권 요구를 포함하고 있어 개선 취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며 “심지어 경총의 부당노동행위 처벌조항 삭제 요구까지 반영한 듯한데, 과연 공익위원들이 ILO 협약 취지에 따르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고 비난했다.

재계는 정반대 관점에서 반발했다. 경총은 “단결권 확대와 관련한 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는 경영계가 생산활동 방어와 기본권 차원에서 요구한 대체근로 허용, 부당노동행위 제도개선과 연계해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사노위에서 협상을 재개하자는 공익위원 제안도 사실상 거절했다. 경총 관계자는 “공익위원 입장은 경사노위 공식입장으로 채택되지 않아 공신력이 없다”며 “국회 논의 과정에서 의견을 개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행정조치는 선 비준?

현재로서는 노사정 협상이 진행되기보다는 정부가 먼저 ILO 핵심협약을 비준한 뒤 입법을 추진하는 이른바 ‘선 비준 후 입법’ 논란이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공익위원들은 이날 입장문에서 “정부와 국회에 공익위원안과 노사정 합의 내용을 반영해 ILO 기본협약 비준 관련 법 개정을 위한 행정적·입법적 조치에 조속히 착수하기를 권고한다”고 밝혔다. 정부의 '행정적 조치'는 '선 비준'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박수근 교수는 이와 관련해 “정부가 중간 역할을 많이 해야 한다는 의도”라고 선을 그었다.

노동계 추천 공익위원인 박은정 인제대 교수(법학)는 “우리 위원회가 선 입법 후 비준을 준비하고자 했지만 실패한 마당에 계속해서 선 입법 후 비준을 고집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아무런 조치 없이 대통령이 먼저 비준하고 국회가 동의하라는 것은 아니다”며 “정부가 충분한 입법안을 마련한 다음 국회에 동의를 요구하는 의미의 선 비준이라면 찬성한다”고 덧붙였다.

반면 재계 추천 공익위원인 김희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선 비준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국내법 개정에 합의한 뒤 입법을 거쳐야 위헌성이 해소된다”고 주장했다.

공익위원 입장문을 작성한 이승욱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선 비준 후 입법 논란을 염두에 두고 문구를 만들었다. 이런 해석도 저런 해석도 가능하다”고 여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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