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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애의 사회를 염원하며
▲ 김형탁 마실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프랑스 혁명의 3대 정신에 속하지 않는 것은?” 어린 시절 사회시험에 이러한 질문이 나오면 “자유·평등·박애”가 아닌 단어를 골라 답안지에 그 번호를 썼다. 숨은 뜻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기계적으로 암기해야 했던 그 개념 중에 실제로 박애는 정확한 번역이 아니고 우애 또는 형제애가 더 알맞은 번역이라는 것은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았다. 교과서 저자가 무지해서 그랬든 아니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이념을 프랑스 혁명의 가치 속에 은근슬쩍 끼워 넣고 싶어 그랬든 결과적으로 우리 세대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았던 것이다. 지금도 프랑스 대사관에서 제공하는 프랑스 헌법 번역문에는 'fraternité'를 '박애'라고 번역해 놓고 있으니 그 영향이 크긴 큰가 보다. 하긴 우애라고 번역됐다고 해서 그 의미를 정확히 설명해 줄 수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우애라는 개념의 의미가 어렴풋이나마 가슴에 와 닿은 것은 역시 또 한참 세월이 지나서였다. 지역에서 좌충우돌하며 지내다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에 대해 공부하면서부터 우애라는 말을 곱씹어 보고 있다. 그 이전까지는 노동조합을 했던 경험이 나의 사고를 지배한지라 우애를 연대와 같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쉽게 단정했다. 우애는 동지들 간의 단결이고 그 단결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내부의 격차와 불평등을 키워서는 안 되는 것으로 사고했다. 즉 연대는 단결의 기초인 셈이다. 그러나 우애 또는 형제애는 단결을 강조하는 개념이 아니라 공동체의 형성과 운영의 기초를 강조하는 개념이다. 단결을 강조하는 우애라면 조폭만 한 조직이 어디 있으랴.

수많은 자유론과 평등론이 존재하지만 우애론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프랑스 헌법에서도 우애의 개념이 자유·평등과 더불어 나란히 실리게 된 것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지 한참 뒤인 1848년이다. 우애라는 개념은 뭔가 추상적이고 지나치게 감성적인 말로 이해됐기 때문이다. 흔히 근대는 개인의 발견에서 시작됐다고 하고, 실제로도 개인 권리를 기초로 사회 질서가 형성됐다.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계약관계에 의해 사회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애라는 말은 생뚱맞을 수 있다.

문제는 평등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자유로운 권리라는 것은 허구적이라는 점이다. 이 점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치고받으며 논쟁해 왔던 이유다. 아주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방식으로.

최근 저명한 학자들의 입에서 “문제는 사랑이야”라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불평등하고 분열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감정, 특히 사랑의 감정이 살아나지 않고서는 힘들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전체주의자들이 사람의 감정을 포로로 삼았던 뼈아픈 역사가 있어서, 또는 사랑이라는 말에는 종교적 색채가 있어서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 애써 외면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공동체를 이루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우리의 문화가 되지 않고서 어찌 지금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을까.

장기 불황이 그 거짓을 폭로하고 있기에 기만 가득한 신자유주의 광풍이 이제는 지나가려나 했더니, 그에 대한 반성이 채 일어나기도 전에 노동하는 인간은 로봇에 의해 일에서 쫓겨나고 있다. 법인이 자연인인 인간과 같은 인격을 부여받은 것처럼, 로봇도 인격을 부여받을 날이 머지않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무슨 수로 로봇에게 세금을 매길 수 있겠는가. 법인에 세금을 매긴다고 사회가 평등해지지 않았던 것처럼 로봇에게 세금을 매긴다고 해서 사회가 평등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 공동체 형성에 초점을 두지 않는 한, 그것도 우애에 기초한 공동체를 형성하지 않는 한 로봇에게 세금을 매겨 일정한 기본소득을 얻는다 하더라도 우리 삶은 별로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다운 사회는 우애에 기초한 무수히 많은 공동체들이 서로 연합할 때 가능하다.

우애의 가치가 중심에 서지 않는 한 여전히 근대는 프랑스 혁명이 던진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지식인들은 탈근대를 이야기하며 섣불리 미시적 영역으로 빠져들었지만 현실의 인간은 근대적 모순에서 전혀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거시적 담론이 필요하다. 국가 중심 거시담론에서 사회 중심 거시담론으로 초점이 바뀌어야 하겠지만. 사회를 중심으로 한 담론은 1980년대에 나타났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실천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실천들이 지금은 비록 보잘것없고 이리저리 헤매고 있지만 새로운 물줄기를 제대로 만들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마실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htkim82@gmail.com)

김형탁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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