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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100주년 연중기획-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⑧] 노동자세상과 조선독립의 횃불, 김 알렉산드라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김 알렉산드라, 1885~1918

1918년 9월 러시아 반혁명세력인 백위군의 장교가 김 알렉산드라를 체포한 후 고문하며 물었다. “조선인인 그대가 왜 러시아의 시민전쟁에 참가했는가?” 그녀는 서슴없이 말했다. “조선 인민이 러시아 인민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하는 경우에만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처형 직전에 또 묻고 답했다. “마지막 소원이 무어냐?” “열세 발자국만 걷게 해 다오.” “왜 하필 열세 발자국이냐?” “가 보진 못했지만 우리 아버지 고향이 조선인데 13도라고 들었다. 내 한 발 한 발에 조선에 살고 있는 인민들·노동자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 새로운 사회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는다.”

이념과 분단의 장벽으로 가려져 있지만, 우리 근현대사에는 민중과 민족의 해방을 위한 길에서 불꽃처럼 살다 간 지사·의사·열사·투사·전사 등 혁명가들이 너무나 많다. 그중에서 20세기 초 노동인권활동가, 한인 최초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당원으로서 사회주의혁명과 조선독립에 헌신하다가 아무르강가에서 총살된 김 알렉산드라의 목소리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쟁쟁하게 울린다.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는 1885년 2월22일 연해주 우수리스크 시넬리니코보 마을에서 태어났다. 우리나라 최북단 함경북도 경흥에서 1869년 당시 대기근을 피해 연해주로 이주, 최초 정착촌 지신허에 잠시 머물다가 추풍지역 시넬리니코보로 옮긴 아버지 김두서(표트르 김)와 어머니 선산 김씨 사이의 오남매 중 셋째였다. 어머니는 아주 어릴 때 사망하고 아버지 손에 키워졌다. 아버지 김두서는 원래 농사꾼이었으나 러시아어를 배워 통역과 하청업자로 일했다. 생활형편도 나아지고 동포들의 고충도 해결해 줘 ‘노야’라는 촌장까지 맡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 동청철도 공사장 비참한 노동인권실태 목격

그러던 중 1896년께 아버지 김두서가 러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블라디보스토크-하얼빈-만저우리) 동청철도 공사 통역관으로 차출됐다. 김 알렉산드라도 하얼빈으로 따라가 소학교를 다니고 중국어를 배웠는데, 철도공사판에서 혹사당하는 중국·조선·몽고 등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아버지 모습을 통해 많은 것을 느꼈다. 특히 1899~1901년 의화단사건이라는 제국주의 침략과 이를 배척하는 중국 민중들의 저항을 목격하면서 반제계급의식에 눈을 떴을 것이다.

1902년 아버지 김두서가 갑자기 별세했다. 김 알렉산드라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폴란드계 러시아 철도기술자인 마르크 이오시포비치 스탄케비치에게 맡겨졌고 그의 아들과 결혼하게 됐다. 러시아 극동문서보관소 자료에 따르면 1903년 10월24일 하얼빈에서 첫아들을 낳는데 곧 죽고 1905년 9월6일 둘째 아들이 하얼빈에서 출생했다. 1910년 7월6일 셋째 아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생했다고 나온다. 무위도식에 술과 도박에 찌든 첫 남편과 이혼하고 둘째 아들을 데리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러시아어교사이자 러시아정교 신부인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오가이(오 바실리)를 만나 셋째 아들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김 알렉산드라는 블라디보스토크 사범대학에 다니면서 러시아 1차 혁명 이후 확산되는 사회주의사상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였다. 1905년 겨울부터 1907년까지 2년간 블라디보스토크 노동운동에 가담했다. 차르 헌병대에 쫓겨 러시아인 동지들과 함께 국경 우사거우강을 건너 중국 동녕현 삼차구 남가우령 조선인촌으로 피신했다. 이런 과정에서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졸업 후에는 1908년 고향마을, 추풍4사에 지역 유지들이 세운 동흥학교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 계급의식을 고취했다.

1910년 조선이 일제에 강점되고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우랄지역 무기공장이나 벌목장으로 많은 한인들이 강제로 동원됐다. 차르 당국과 그 앞잡이 청부업자들은 상습적인 체불, 비인간적인 대우로 일관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민회는 1914년 말 김 알렉산드라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두 아이와 남편을 두고 노동자들의 인권 보장과 사회혁명의 주체 형성을 위해 단호히 떠났다.

우랄노동자동맹의 기수

우랄의 노동현장은 출입 통제·서신 차단·용병 감시·파업시 물자 중단이나 대량 학살까지 자행됐다. 아버지가 일했던 하얼빈의 동청철도 공사장보다 열악했다. 김 알렉산드라는 밤낮없이 뛰어다녔다.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동시에 착취계급을 없애는 것만이 노동자들에게 승리를 가져다준다는 확신으로 교육·선전·조직 활동에 나서 우랄지역 노동운동을 빠르게 성장시켰다. 볼셰비키에 입당한 시기도 이 무렵으로 짐작된다.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나고 제정러시아 차르체제가 무너졌다. 두 개의 권력, 하나는 자본가와 지주 중심으로 1차 세계대전을 계속하자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이끄는 케렌스키 임시정부, 다른 하나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와 1차 대전 중지를 외치는 노동자·농민·병사 대표자 소비에트가 출현했다. 우랄지역에도 혁명의 바람이 세게 불었다. 김 알렉산드라는 주민들에게 열렬히 호소했다. “우리 5천 조선인·중국인 노동자들은 오늘부터 더 이상 제정러시아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노동자·농민·병사 대표자 소비에트가 권력을 쥔 국가의 국민이 됐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청부인들과 차르권력 사이에 맺어진 불공정한 계약의 이행을 무조건 거부합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됐다. 김 알렉산드라는 저명한 볼셰비키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기업·공장·노동현장을 누비며 노동조합 가입과 그 안의 당 세포를 확대하는 등 지하당을 빠르게 합법화해 1917년 3월 볼셰비키 조직인 우랄노동자동맹이 결성됐다. 김 알렉산드라는 1917년 두 번 페테르부르크에 다녀왔는데, 아마도 당 중앙의 레닌을 만났던 것 같다. 그리고 당의 요청으로 극동지역에 파견됐다. 1917년 6월 말 예카테린부르크를 떠나 옴스크·치타·모고차를 거쳐 7월 말 하바롭스크에 도착했다.

아시아 최초 사회주의정당, 한인사회당의 산파

1917년 10월17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2차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극동지방 대표자대회에 아무르스크의 대표자로 참석했다. 하바롭스크시당 책임비서 및 회계담당인 김 알렉산드라는 1917년 12월25일부터 이듬해 1월2일까지 하바롭스크에서 개최된 3회 극동지방 소비에트 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고 1월18일 극동지방 노농병 소비에트 자치위원회(이후 극동인민위원회로 개칭)에서 외교부장(외교 인민위원)으로 일했다. 김 알렉산드라는 조선인들만이 아니라 러시아인·중국인, 심지어 헝가리인·독일인에게도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모든 서민들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러시아어·조선어·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해 민원을 신속하게 해결하고 외국인 여권발급제도까지 간소화해 줬기 때문이다.

김 알렉산드라는 1918년 2월 하바롭스크에서 이동휘·양기탁·유동열·이동녕 등 조선·중국·극동 독립운동가 수십 명과 함께 조선혁명자대회를 열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입장에서 파벌주의를 비판하고 단결투쟁을 호소하는 그녀의 연설 이후 간담회에서 분파싸움 중지를 약속했는데도 끝내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동녕·양기탁·안공근 등의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떨어져 나가고 이동휘·유동열 등의 민족적 사회주의자들과 김 알렉산드라·오하묵 등의 한인 2세 볼셰비키들이 힘을 합쳐 1918년 4월28일 한인사회당을 결성했다. 아시아 최초 사회주의정당이 탄생한 것이다. 위원장은 이동휘, 군사학교장 겸 군사부장은 유동열, 부위원장은 오 바실리(김 알렉산드라의 재혼남편), 청년부장은 오성묵, 기관지 편집인은 김립이 맡았다.

한인사회당은 김 알렉산드라가 일하는 소비에트 권력으로부터 활동가 급여까지 지원받았다. 기관지 <자유종>을 발간하고 ‘보문사’라는 출판사를 설립했다. 연해주·아무르 등지에 8개 지부를 설립하고,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인노동회와 우랄노동자동맹을 편입시켜 한때 당원이 1만여명에 이르렀다. 또 조선인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만주의 소규모 독립군 양성학교를 통합해 갔다. 홍범도 부대도 하바롭스크로 옮겨 왔고 1918년 6월 말 100여명의 보병으로 이뤄진 한인적위대를 편성했다.

이즈음 극동지역에 반혁명세력의 도발이 시작됐다. 1918년 6월29일 블라디보스토크에 수용된 체코군 포로들이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8월 초 영국·프랑스·미국·일본 등은 체코군대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무력을 들이밀었다. 특히 일본군은 백위군과 합세해 극동 일대를 짓밟기 시작했다. 적위대는 이들 반혁명에 맞서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한인적위대도 볼셰비키 제1국제연대에 속해 우수리전투에 참여했지만 절반의 병력을 잃고 후퇴했다.

조선의 민족해방·민중해방 기원한 아무르강변의 열세 발자국

▲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같은해 8월 말 극동인민위원회는 유격전 체제로 전환하기로 결정하고 아무르주로 후퇴했다. 9월 초 한인사회당 근거지인 하바롭스크마저 백위군에 함락됐다. 한인사회당 간부들은 아무르강을 건너 중국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철수 과정에서 마지막 배를 탄 김 알렉산드라를 비롯한 볼셰비키들이 칼미코프의 백위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한인 최초의 볼셰비키 당원이자 한인사회당의 산파였던 김 알렉산드라는 1918년 9월16일 새벽 아무르강변(이후 ‘죽음의 골짜기’라고 불림)에서 열세 발자국을 걷고 총살당했다. 그녀의 나이 33세 때 일이다. 타오르는 횃불처럼 어둠을 사르고 노동자와 조국의 앞길을 밝히고 장렬히 전사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 그러나 만일 김 알렉산드라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한인사회당 이후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극심한 분열·갈등을 미리 막아 내고, 역사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1921년 자유시참변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지 않았을까. 가슴 저릿하게 사색하게 된다.

정성희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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