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최영애)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을 먼저 비준한 뒤 입법을 하는 ‘선 비준 후 입법’을 공식입장으로 내놓으면서 파장이 일고 있다. 국가기관인 인권위가 이런 입장을 내면서 정부도 선 비준 후 입법 의견을 무시하기 어렵게 된 모양새다.

인권위는 지난해 12월 ILO 87호(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와 98호(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원칙 적용에 관한 협약)를 비준하라고 고용노동부에 권고했다.

인권위 “헌법에서 보장하는 기본권 엄격히 준수해야”

7일 인권위와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최영애 위원장은 지난 4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해 “ILO 핵심협약 내용이 헌법에서 규정하는 노동 3권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고 판단했다”며 “헌법적 가치를 수호해야 한다고 보고 권고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 위원장은 “ILO 핵심협약을 먼저 비준하고 이에 맞게 국내법을 정비해야 한다는 게 인권위 입장”이라고 강조했다.<본지 2019년 4월5일자 '인권위 ILO 핵심협약 선 비준 후 입법 필요' 참조>

인권위는 이미 선 비준 후 입법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확인됐다. 올해 1월23일 노동부에 송부한 ‘ILO 결사의 자유 관련 87호, 98호 협약 가입(비준) 권고’ 결정문에 이 같은 내용을 포함시켰다.

인권위는 결정문에서 “우리나라도 ILO 87호와 98호에 가입하고 그 이행과 관련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 노동기본권이 보장되는 환경을 조성해 나감으로써 노동인권 현안들을 해소하는 법적·제도적 토대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인권위 관계자는 “국회 운영위에서 나온 최영애 위원장 발언은 결정문에 기초한 것”이라며 “87호와 98호는 ILO 여러 협약 중 기본협약(핵심협약)이고 헌법에서 보장하는 기본권인 만큼 엄격하게 준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 “플랜B로 선 비준 고려, 노동부 입법안” 주문

인권위가 "ILO 핵심협약은 헌법이 보장하는 내용"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선 비준 후 입법 방향을 제시한 것과 관련해 유의미한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 공익위원인 이승욱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재 정부는 선 비준은 안 된다는 입장이지만 이런 인권위 입장이 나오면서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며 “상당한 임팩트가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선 입법론자로 알려진 이 교수는 최근 경사노위 협상이 진척되지 않자 ‘플랜B’로 선 비준 의견을 내놓은 바 있다. 그는 “지난 4일 노동 3대 학회 공동정책토론회에서 다른 토론자 2명과 함께 저도 플랜B로 선 비준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송은희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 선임간사는 “인권위 입장을 두고 내부에서 환영한다는 의견을 나눴다”며 “최 위원장이 ILO 핵심협약은 헌법에 있는 내용이라고 잘 지적했다”고 말했다. 그는 “87호와 98호는 기본협약”이라며 “지금 경사노위에서 이의 비준을 두고 재계와의 거래조건처럼 논의하는 것은 이상한 상황 아니냐”고 반문했다.

청와대 “노동부 부정적이지만 인권위 의견 검토할 것”

인권위 입장이 알려지면서 정부와 청와대 역시 부담을 느끼는 분위기다. 노동부는 국내법을 ILO 핵심협약에 부합하도록 정비한 뒤 협약을 비준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노동부 관계자는 “헌법(60조)에서 국회가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며 “선 비준은 이에 위배되기에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이 관계자는 “국회 동의를 얻는 데에는 여러 방식이 존재한다”고 덧붙였다.

청와대도 고민 중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노동부와 법제처가 선 비준은 어렵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면서도 “인권위원장이 그런 의견을 말씀하셨으니 검토는 해 볼 것”이라고 말했다.

윤효원 글로벌 인더스트리 컨설턴트는 “인권위는 헌법을 통해 이미 ‘선 입법’이 돼 있다는 의견을 낸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정부 관료가 해야 할 일은 ILO 기본협약 비준을 위한 정부 입법안을 4월 임시국회에 제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왜 정부 관료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국회와 헌법 핑계를 대느냐”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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