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다물단의 최주영이 중국 천진에서 체포됐다는 소식을 전하는 “군자금 15만원 모집중 피체”라는 제목의 <동아일보> 기사(1928년 2월5일).

대한민국이 최주영(본명 최태윤, 1896~1933)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한 것은 2011년의 일이다. 반면 독립운동가로서 최주영의 삶을 추적해 보면 누구든 2011년에야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한 대한민국의 보훈 현실에 자연스럽게 개탄을 금할 수 없게 된다.

교사 출신 독립운동가 최주영의 1차 망명

최주영은 경성 삼판동(현 용산구 후암동) 출신이다. 일찍이 교원양성소를 졸업하고 수원공립보통학교(1917)와 평택공립보통학교(1918)를 거쳐 경성의 미동공립보통학교(1919, 현 미동초등학교)에서 교원으로 있던 인물이다. 일제는 교원의 급격한 수요증가에 부응하기 위해 1913년부터 경성고보 부설기관으로 임시교원양성소를 설치·운영했다. 최주영은 1917년 또는 그 이전에 교원양성소를 졸업했을 것이다.

1933년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최주영은 1919년 3·1 혁명에 참여한 후 같은해 학교에 사표를 제출한다.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할 목적으로 1922년 중국 북경으로 망명한다. 1차 중국 망명 시절 최주영은 교사 출신답게 북경에 있는 동포 자녀를 교육시킬 목적으로 1922년 8월 창립한 북경한교교육회(회장 이성영)에 참여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편을 위해 1923년 1월 소집된 국민대표회의에도 참여한다.

그런 최주영이 활동 여건이 여의치 않아 조선으로 일시 귀국한 것은 1924년 1월께다. 그가 귀국한 사정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국민대표회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운명에 대해 개조파와 창조파로 분열하면서 기대했던 성과를 이뤄 내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다물단 단원으로 밀정 처단, 독립군자금 마련 활동(2차 망명)

최주영이 귀국해 약 1년간 머무른 곳은 시흥군 북면 동작리(현 서울 동작구)의 최유선 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유선은 최주영의 아버지 또는 친척이었을 것이다.

최주영은 1925년 1월 재차 중국으로 망명해 북경을 거쳐 천진에 자리를 잡는다. 최주영이 다물단(단장 황익수)에 가입해 활동한 것도 바로 이 2차 망명 시기다.

다물단은 친일파와 밀정 등을 처단하거나 독립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는 등 의열투쟁 단체로 신채호·유자명이 관여한 무정부주의 성향의 조직이었다. 다물단이라는 조직 명칭에는 용감·전진·쾌단 등의 의미와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1931년 체포된 다물단 단원 이우민의 일제 신문기록에 따르면 “입을 다물고 실행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주영은 1925년 의열단(단장 김원봉)과 다물단이 공동으로 벌인 일제의 고급 밀정 김달하 처단 투쟁에 참여해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한다. 김달하는 외아문(통리아문) 주사 출신으로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서북학회 총무를 지냈는데,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1913년 조선총독부 밀정이 돼 북경에서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하던 인물이다. 그는 초기 중화민국 총리를 지내기도 한 북양군벌의 거두 단기서의 비서로 있으면서 또 다른 고급 밀정 정운복(초대 서북학회 회장)과 연계해 10여년간 암약하면서 많은 청년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김달하의 처단에는 의열단의 이종희와 이기환, 다물단의 최주영과 이규준이 함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달하가 처단된 직후 동아일보는 “밀정, 필경 피살”(1925년 4월4일)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보도했다. 다물단은 1928년 4월에도 또 다른 고급 밀정 김천우를 처단했다.

2차 망명 시기 최주영은 다물단 활동 외에도 천진 한교단(韓僑團, 단장 유세관) 총무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한교단은 겉으로는 ‘부인 직업소개, 공동묘지 경영, 유치원 설립 등을 목적’으로 하고 유치원(3·1 유치원)도 직접 경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천진지역 교포들의 독립의식을 고취해 독립운동 기반을 넓히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거액 독립군자금 마련 활동 중 체포

최주영이 천진 이탈리아 조계에서 이탈리아 경찰에 체포된 것은 1927년 12월의 일이다. 당시 최주영은 이탈리아 경찰의 검문과 압수수색으로 동지 강익찬(당시 26세)·김관우(당시 23세)·김용선 등과 함께 체포됐다. 곧 일경에 넘겨져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됐다.

최주영은 체포되기 전 영국 조계에 있던 조선인 박도일이 한 외국인에게서 거액을 상속받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만주에서 온 강익찬·김관우·김용선과 함께 박도일에게 상속액 중 15만원 상당을 군자금으로 내놓으라고 할 참이었다. 권총까지 준비하면서 만반의 태세를 갖춘 후 백옥산이 만주에서 오기를 기다리던 중 불행하게도 이탈리아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당시 이 사건은 “상해 가정부 거두 이동녕 체포 호송”이라는 오보로 처음 알려지는데, 이들의 소지품에 이동녕의 이름이 있었던 관계로 오해를 받은 탓이었다. 이후 오보가 정정되며 최주영 일행의 이름이 등장하는 후속기사가 나오지만, 이때도 최주영 일행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녕의 부하로 소개된다. 역시 오보였다.

이 사건은 1920년대 후반 수많은 국내진공 작전을 주도했던 만주의 독립군 대장 중 한 명인 이응서(1890~1933)가 1929년 체포되면서 또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최주영 일행을 취조한 일경은 이들의 배후로 만주의 백옥산을 지목했는데, 그가 바로 이응서와 동일인물이었던 것이다.

고문 후유증으로 서른여덟 젊은 나이에 사망

당시 재판기록을 보면 최주영은 일제의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군자금 모금 계획이나 다물단 백옥산과의 관련 사실 일체를 부인하는 신문투쟁과 재판투쟁을 했다. 군자금 모금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다 체포된 게 아니라 실행 준비 중 이탈리아 조계의 주택에서 우연히 임시검문으로 이탈리아 경찰에 체포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주영은 가지고 있던 권총도 군자금 모금을 위해 마련한 것이 아니라 민무라는 인물이 잠시 맡기고 간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함께 체포된 강익찬과 김관우 등을 자신의 집으로 파견한 배후 인물 백옥산에 대해서도 자신이 백옥산의 조선혁명군에 가입해 알게 된 인물이 아니라 1914년 여름 경성부내 청림교 중앙본부에서 처음 알게 됐을 뿐이며, 그 후 1927년 북경에 있을 때 우연히 봉천에 있는 백옥산과 서신 왕복을 하던 중 천진으로 이주 후에도 다시 무순에 있는 백옥산으로부터 가까운 장래에 천진 방면으로 놀러온다는 서신을 받고 아편밀매 때문이 아닌가 하고 기다렸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백옥산의 소개장을 들고 온 강익찬과 김관우에 대해서도 단지 마약밀매를 위한 백옥산의 심부름꾼으로 여겼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최주영의 이러한 신문투쟁과 법정투쟁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오히려 더 모진 고문으로 되돌아왔다. 아울러 일제는 백옥산과 최주영의 관계를 시인한 강익찬의 진술을 근거로 최주영에게 징역 2년형을 언도했다. 최주영은 굴하지 않고 항소와 상고를 거듭하지만, 일제는 이마저 기각한다. 결국 최주영은 예심 기간까지 합쳐 3년 가까이 옥살이를 한 후 1930년 9월에야 출소한다.

출소 이후 최주영은 죽첨정(현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있는 부인 한영순의 오빠 한인원의 집에서 병을 치료하며 요양했지만 끝내 고문 후유증을 이겨 내지 못했다. 1933년 8월28일 감옥에서 나온 지 3년 만에 38세의 젊은 나이로 독립운동 제단에 소중한 목숨을 바치면서 생을 마감한다.

당시 동아일보는 “천진사건 주모 최태윤씨 영면”(1933년 9월2일)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태리 조계에서 7년 전에 체포돼 경성에서 3년 복역을 마치고 출감한 후 옥중의 득병으로 이래 신음 중이던 최태윤씨는 지난 28일 오후 4시에 시내 모병원에서 별세했다 한다”라고 최주영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씨의 나이는 38세의 원도 있는 청년이었다”고 애도를 표한다.

교사 출신이었음에도 박정희와 다른 길 선택한 최주영

▲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교사 출신으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두 차례 중국 망명을 단행하면서 다물단 단원으로 치열한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다 간 최주영은 같은 교사 출신이면서도 일본군 장교가 된 박정희의 경우와 뚜렷이 대비된다는 점에서 우리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런 최주영이 2011년에야 겨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게 된 것은 그의 후손이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어쩌면 후손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당시 언론 자료나 일제의 자료에 독립운동에 참여한 최주영의 모습이 비교적 세세하게 남아 있는 현실에서 보훈처가 이를 적극적으로 챙기지 못했다는 것은 무슨 변명으로도 합리화하기 힘들다. 보훈처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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