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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O 협약의 한국어 번역
▲ 박제성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지금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비준을 둘러싼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어 번역정본의 확정 절차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예를 들어 ILO 헌장에 “어느 나라가 인도적인 근로조건을 채택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른 나라들이 근로조건을 개선하려는 데 장애가 된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의 영어본과 불어본은 각각 이렇다(둘 다 정본이다).

- (영어본) “the failure of any nation to adopt humane conditions of labour is an obstacle in the way of other nations which desire to improve the conditions in their own countries.”

- (불어본) “la non-adoption par une nation quelconque d'un régime de travail réellement humain fait obstacle aux efforts des autres nations désireuses d'améliorer le sort des travailleurs dans leurs propres pays.”

한국어 번역본이 “인도적인 근로조건”이라고 번역한 구절을 영어본에서는 “humane conditions of labour”라고 표현하고, 불어본은 “régime de travail réellement humain”이라고 표현한다. 불어본을 직역하면 “진정으로 인간적인 노동의 체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어본은 영어본을 번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영어본에서 “인도적인(humane)”이 “조건(conditions)”만을 수식한다면, 불어본에서 “진정으로 인간적인(réellement humain)”은 “체제(régime)”를 수식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노동(travail)”을 수식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체제를 수식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에는 영어본과 유사한 의미가 된다(체제가 조건보다 좀 더 넓은 의미라면 그것에서도 의미 차이가 날 수 있겠다). 그러나 노동을 수식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영어본이 전혀 내포하고 있지 못한 의미가 된다. 즉 노동을 둘러싼 조건이 인도적이거나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를 넘어, 노동 그 자체가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이 돼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국제법상 조약의 용어는 각 정본상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이 담론적 수준의 차이에 대한 인식은 ILO가 지향하는 노동의 의미를 둘러싼 한 차원 더 높은 수준의 논의를 가능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노동담론의 형식과 내용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ILO 협약의 한국어 번역정본을 확정하는 일은 단순히 좋은 번역이나 오역의 문제를 넘어, 노동정책이나 노동담론의 폭과 수준을 결정하는 데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일이 된다. 더군다나 한국의 법원이 재판을 할 때 근거로 삼는 텍스트는 한국어 번역본일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어 번역정본의 확정은 법해석과 법적 논증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외국어 조약문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뜻을 더하거나 빼는 식으로 법문을 왜곡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주관적 해석은 최대한 배제돼야 한다. 그러나 해석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 번역은 적어도 법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법 자체가 끊임없는 해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주관적 해석의 충돌을 ‘객관적’ 번역을 확립하는 과정으로 삼는 것이다. ILO 87호 협약이나 98호 협약에서는 “travailleur”(불어본) 또는 “worker”(영어본)라는 용어를 쓴다. 한국어 번역본에서 이 용어를 “근로자”로 번역한다면, 이때 이 “근로자”의 의미는 근로기준법에서 말하는 근로자인가, 아니면 노조법에서 말하는 근로자인가? 불어본과 영어본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어떤 용어로 번역해야 한국의 맥락을 반영하면서 외국어 조약문의 의미를 왜곡하지 않는 번역이 될까? 그리고 이 일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jeseongpark@kli.re.kr)

박제성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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