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최재형 선생(1860~1920)

을사늑약을 강요하고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에 앉아 조선 땅을 일제 식민지로 만든 주모자,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안중근 의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의 배후인물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이 바로 안중근 의사의 배후다.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는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파견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으로 조선의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백성들이 격분하고 애국지사들이 전국 도처에서 의병투쟁에 떨쳐나섰다.

하지만 일제의 잔인한 폭압과 집요한 추적으로 근거지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두만강 건너편 러시아 땅, 연추(얀치혜, 현재 크라스키노 북쪽 10리)가 그곳이다. 조선 북부와 가까웠고 중국 훈춘과 70리길이라 국내 진공, 만주와의 연계 등 항일의병투쟁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범윤·홍범도·유인석·이진용 등의 의병장들, 이상설·이위종·이동녕·정순만·정재관 등에 이어 안창호·이종호·이갑·조성환·유동열·박은식·신채호·이동휘·박순·안중근 같은 독립투사들이 속속 모였다. 일찍부터 조선 이주민들이 기반을 닦아 왔고 특히 그 지도자 최재형이 항일투쟁을 적극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재형은 요즘으로 말하면 재벌급이었다. 그런데도 개인의 부귀영화를 좇지 않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선독립과 동포 지원에 모든 것을 바쳤다.

안중근 의사가 여순 일제관동법원 최후진술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요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싸운 것이다. (…) 국제공법·만국공법에 의해 처분되기를 희망한다”라고 밝혔는데, 유인석 의병장의 아들 유해동의 육필자료를 분석한 이태룡 박사(의병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이때의 '대한의군'이 바로 '13도 의군'이다. 대한의군 구성은 총재에 이범윤, 총대장에 김두성(金斗成, 유인석의 변성명), 대장에 전제덕·김영선, 영장에 안중근·엄인섭·백규삼·이경화·김기룡·장봉한 등이었다. 군자금은 최재형이 맡았다.

가출소년 최재형, 세계를 돌며 견문을 넓히다

최재형(1860년 8월15일~1920년 4월7일)은 함경도 경원에서 노비 아버지와 기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869년 아버지 손에 이끌려 조선인들이 이주해 정착해 있던 러시아 지신허로 갔다. 두만강 주변에 살던 조선인들이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들어간 것은 1860년 이전이었지만 영구 정착을 목적으로 이주한 것은 1863년 12월쯤 함경도 무산 출신 최운보와 경흥 출신 양응범이 농민 13가구를 이끌고 처음으로 러시아 포시예트 구역에 정착하면서다. 이들이 지신허 마을을 개척했다. 1864년 60가구 308명, 1868년 165가구로 늘었다. 1869년에는 766가구가 거주하는 대표적인 한인마을로 성장했다. 최재형은 빈궁한 살림살이를 떠맡은 형수의 심한 구박으로 굶기를 밥 먹듯 하다가 11세가 되던 해 가출을 결행했다. 며칠간 걸어서 포시예트 항구에 이르렀는데 기진맥진해서 실신해 버렸다.

생사기로의 최재형을 발견해 돌본 사람은 세모노비치라는 원양어선 선장이었다. 운명의 대전환을 가져올 은인을 만난 것이다. 최재형은 선장 부부의 양아들로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다. 선장 부인에게서 러시아어와 서양학문을 배웠다. 선장 부부와 함께 1871년부터 1877년까지 6년간 상선을 타고 세계를 돌며 견문을 넓히고 무역을 익히면서 풍부한 학식과 폭넓은 사고를 가진 청년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최재형은 17세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당시 제정 러시아는 항구를 비롯한 연해주 개발에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생존에 몸부림치는 조선 이주민들이 여기에 종사하게 됐다. 조선 이주민들의 노동현장을 관리할 통역관이 필요했는데, 유창한 러시아어와 능숙한 작업지휘능력을 겸비한 최재형이 적임이었다. 그는 조선 이주민들의 처우개선을 지원하는 동시에 연해주 남부 일대 도로공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러시아 황제로부터 은급훈장까지 받았다.

최재형은 개인적 치부보다 동포들의 생활지원에 더 큰 열성을 보였다고 한다. 신세를 진 연해주 한인들은 너무 고마워서 최페치카(따뜻한 난로)라고 부르며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를 걸어 놓았다고 안중근 의사가 증언한 바 있다.

연해주 동포 지원한 ‘최페치카’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최재형은 러시아군의 보급품 조달을 맡아 한 달에 소 150마리 등 막대한 군수품 공급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 그는 항구·도로·막사 건설과 군납품으로 갑부가 되고 니콜라이2세 대관식에 초청받는 거물급 인사가 됐다. 한인지역 군수 정도의 공직인 ‘도헌’으로 선출됐는데,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예금해 매년 동포 자녀들 몇 명씩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유학 보냈다.

그러던 중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을사늑약으로 조선이 일제 속국으로 전락하자 최재형은 항일독립운동가로 변신해 또 한 번의 인생 대전환기를 맞는다.

1907년부터 연추에 모여든 독립투사들이 1908년 4월 최재형 선생의 집에서 수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동의회’라는 항일의병조직을 결성했다. 총재 최재형, 부총재 이범윤, 회장 이위종, 부회장 엄인섭, 서기 백규삼으로 구성됐다. 안중근·김기룡·엄인섭은 산하 의병부대 영장들이었다. 이들은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600여명의 의병을 훈련시킨 다음 국내 경원·회령·신아산·여산 등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해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일본인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군 40여명이 전사할 때 조선의병 4명이 부상당했다. 최재형의 재력과 인맥으로 동의회 의병들이 먹고 자고 훈련하고 최신 러시아제 무기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안중근이 이끄는 대한의군은 국내 진공작전에 연전연승을 하다가 영산전투에서 참패하게 된다. 참패 원인은 어처구니없게도 포로를 석방해 비밀루트가 발각됐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러시아를 겁박해 연해주 의병조직의 구심인 최재형과의 거래를 끊게 하는 등 탄압을 가했다. 그럼에도 최재형은 자금난으로 문을 닫은 해조신문을 인수한 뒤 대동공보를 발행해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안중근은 12명의 동지를 규합해 독립투쟁 의지를 다지며 최재형의 집에서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동맹을 결성했다. 그 후 대동공보 기자증을 가지고 활동하던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동공보에서 대책을 숙의했다.

안중근 하얼빈 의거의 배후 최재형

1909년 10월26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했다. 당시 보안관계상 그 누구의 언급도 기록도 없지만 최재형이 권총 두 자루와 자금 일체를 지원해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를 성공하게 했을 것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최재형은 변호사를 붙여 안중근을 살려 내려고 무진 노력했다. 하지만 사형이 선고되고 교수형이 집행됐다. 안중근의 어머니·부인·자녀를 연해주로 데려와 돌봐 주고 가슴 아파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최재형은 한인마을에 무려 32개의 학교를 설립해 동포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킨 교육자이기도 했다. 1911년에는 권업회(회장 최재형, 부회장 홍범도)를 만들어 이를 주축으로 1914년 최초의 해외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대통령 이상설, 부통령 이동휘)를 세웠다. 권업회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본부를 두고 북만주에 ‘대전학교’라는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사장 최재형, 주필 신채호, 그리고 이상설·정도빈이 함께 운영한 ‘권업신문’을 발행했다.

1918년 5월21일부터 31일까지 러시아 전 지역 한인 대표 100여명이 우수리스크에 모여 ‘전로한족중앙총회’를 조직하고 최재형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했다. 이를 통해 1919년 4월에 만들어진 한성임시정부·상해임시정부보다 빠른 그해 2월 문창범·이동휘·최재형·김철훈 등이 주도해 ‘대한국민의회’라는 국내외 최초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최재형은 외무부장을 맡았다.

1920년 4월 참변 때 일본군에게 총살당하다

1919년 3·1 운동 때 연해주는 어떤 분위기였을까. 연해주는 1917년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국내보다 더 변혁적이었다. 만세시위도 들불처럼 번졌다. 대한국민의회는 같은해 3월17일 우수리스크에서 독립선언서 발표를 주도했다. 이어 해삼위(현재 블라디보스토크)·연추 등으로 확산됐다. 1919년 8월 대한국민의회는 상해임시정부로 합병됐다. 최재형은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임됐지만 부임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일본 군대가 러시아 내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연해주를 침공해 반혁명세력인 백군을 지원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 양재덕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 이사장

한인 독립운동과 러시아혁명의 불길에 놀란 일제는 1920년 4월4일부터 이틀간 끔직한 만행을 저질렀다. 4월 참변이 그것이다. 일본군은 한인 거주지를 무차별 습격해 무수한 인명을 학살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만 300여명의 한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한인독립부대를 총결집시켜 일제-백군에 맞서 싸웠던 최재형은 자녀들이 인질로 고문·학살당할까 봐 스스로 우수리스크 자택에서 체포돼 4월7일 일본군에게 총살당했다. 그의 나이 만 59세 때 일이다. 엄청난 부자인데도 조국과 동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운 ‘최페치카’ 같은 분이 요즘에는 혹시 없을까 살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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