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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꽃과 나무 ⑥ 플라타너스
▲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내가 해직된 지 10여년 만에 선린인터넷고등학교(당시는 선린정보산업고등학교로 옛 선린상고)로 복직했는데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 있었다. 1998년 2학기 시작인 9월 초였다. 우여곡절 끝에 99년부터 전교조를 합법화하기로 결정된 뒤 해직 상태로 조합 상근 일을 하던 우리는 모두 학교로 돌아가기로 했던 것이다. 나는 당시 전교조 수석부위원장이었는데 연말 조직개편까지는 복직해서도 그 일을 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노원구 우리 집과 영등포 전교조 사무실 중간에 있는 선린을 선택했다. 아침에 학교로 출근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퇴근하면 바로 전교조 사무실로 가서 늦게까지 조합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첫 출근 날 서울지하철 1호선 남영역에서 학교까지의 언덕길을 등교하는 학생들과 같이 올라가면서 마음이 두근거렸다. 10년 만의 첫 출근이라고 어느 방송사에서 취재까지 나와 카메라를 들이대는 바람에 더 그렇기도 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가리라 굳게 믿고 있었는데도 막상 현실이 되니 가슴이 뛸 수밖에 없었다. 또 한편으로는 새로 만날 교사들과 학생들에 대한 기대와 알 수 없는 두려움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다. 그만큼 학교를 떠나 있었던 10년은 내게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설립한 지 100년이나 된 선린학교는 언덕 위에 있었다. 야구 명문답게 야구장을 겸한 운동장이 있었고 운동장을 내려다보며 낡은 교사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투자를 제대로 하지 않은 오래된 공립학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는데, 운동장 한쪽에 서 있는 우람한 나무로 눈길이 갔다. 내가 선린의 플라타너스를 처음 본 순간이었다. 잎이 크고 시원할뿐더러 웬만한 곳에서는 잘 자라기 때문에 가로수로 많이 심는 키 큰 플라타너스가 운동장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북아메리카가 원산지인 플라타너스는 1910년쯤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데 주로 가로수나 학교 등 공공건물의 정원수로 많이 심었다. 원체 크고 우람하게 자라는 바람에 주변 건물이나 다른 나무들 사이에서 제대로 자라지 못하거나, 가로수로 심은 것은 높이 자라지 못하게 가지를 잘라 버려서 이상한 모양을 한 것이 대부분인데, 선린 운동장에 있는 이 플라타너스는 아무 제약 없이 제대로 자라 정말 크고 보기가 좋았다. 학교를 처음 지을 때 심은 것 같은데 학교와 함께 늙어 가고 있었다. 여름에는 이래저래 지친 학생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내주며 편히 쉬게 하더니, 교실에서 가끔 창밖을 내다보다가 만나는 이 플라타너스는 철 따라 다른 모습으로 편안하고 넉넉하게 뭔가를 안겨 주는 것 같아 참 좋았다.

학교와 학생들은 만만하지 않았다. 우리가 주장하던 참교육의 이념과 최선을 다해 보려는 나의 의지는 변해 버린 학교 현실 앞에서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당시의 입시 중심 학교교육은 실업계 교육이 설 곳을 마련해 주지 않았고, 목표를 상실한 학생들은 방황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교실은 활기가 없었고 교사들도 절망하고 있었다. 중학교 성적순으로 인문계 고등학교까지 다 가고 남은 학생 중에 나은 학생은 공업 계열로 가고, 그러고도 남은 학생이 정체성을 잃은 상업계 고등학교로 어쩔 수 없이 오는 형편이었으니 오죽했겠는가.

나는 문학을 가르쳤는데 내가 좋아하기도 하고 또 오랜만의 수업이라 준비도 열심히 하며 최선을 다했음에도 너무 힘들었다. 신나는 수업은 수업을 통해 교사가 힘을 얻는데 한 시간 한 시간 할 때마다 진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러려고 내가 복직했던가라는 자책감이 들기도 했다. 학교 현장의 어려움을 절감했다. 주변 교사들이 위대해 보였다.

그러다 만난 교사가 이연심 선생이었다. 나하고 같은 시기에 어느 중학교에서 전근 오신 양호교사였다. 대학 때 동아리 활동으로 한 연극을 취미로 계속하고 있었는데 상당한 수준이었다. 전입 동기인 우리는 가끔 만나 어려움을 토로하며 고민을 나누기도 했는데 연극을 통해 아이들을 자극하고 동기를 부여하면 뭔가 생기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연극반을 만들었다.

그 무렵 나는 수업이 없는 시간이면 양호실에 가서 쉬기도 하면서 이연심 선생과 학생들 얘기며 연극 얘기며 실업학교의 문제점을 토론도 하며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애썼는데, 그때 창밖으로 보이던, 말없이 모든 것을 주며 넉넉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플라타너스가 큰 힘과 위로가 됐던 것 같다. 나도 존재 자체로 누구에게는 시원한 그늘이 되고 누구에게는 따뜻한 위로가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바람에 흔들리며 말없이 서 있는 플라타너스에게 부끄러웠다. 언제 한 번 다시 가봐야겠다.

전태일재단 이사장 (president1109@hanmail.net)

이수호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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