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효원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노동운동은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파산하면 누가 가장 즐겁게 웃을지 따져야 한다. 10% 조직 노동인지, 계층별 3인이 대표한다는 90% 미조직 노동인지, 그렇지 않으면 한국경총이나 대한상공회의소로 대표되는 자본인지 따져야 한다.

경사노위 '폭망'을 기뻐하는 세력이 노동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언론인지, 아니면 자본 편향의 언론인지 살펴야 한다. 경사노위가 위축되면 비례해 위축될 관료들이, 한 줌도 안 되는 양심적인 관료인지, 아니면 대통령이 바뀌어 복지부동 눈치 보다가 다시 기득권 세력과 손잡고 기지개를 켜는 수구 관료인지 정확하게 진단해야 한다.

경사노위 해체는 관념적 노동운동 일각의 주장을 넘어 이제 자유한국당의 주요 주장으로 발전 중이다. 민주노총 불참에 기뻐하는 것은 독점자본과 수구 관료만이 아니라 노동운동 일부임도 드러나고 있다. 민주노총 안에만 반대파가 있는 게 아니다. 한국노총 안에도 민주노총이 경사노위에 안 들어오길 바라는 흐름이 있다. 전혀 다를 것 같은 양 극단이 이해를 일치하고 입장을 상통하는 기회주의는 역사에서 흔히 보는 일이다.

경사노위가 자본의 이익을 위해 신자유주의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대한민국 국가기관 중에 그렇지 않은 게 뭐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양대 노총이 참여하는 수십 개가 넘는 국가기관들은 자본의 이익을 위해 기능하는 수단으로서의 국가기관이라는 혐의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대통령이 위원장으로 있는, 하는 일도 없고 되는 일도 없는 일자리위원회에 민주노총 간부들이 꼬박꼬박 참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경사노위를 부정하는 논리라면 지방노동위원회나 중앙노동위원회에 민주노총이 꼬박꼬박 참석하는 현실도 이해하기 어렵다. 노동위 결정이 노동에 늘 유리한 것도 아니거니와, 설사 유리한 결정이 내려져도 수구 판사가 똬리를 튼 법원에 가면 뒤집히는 게 다반사다. 경사노위가 자본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도구라서 들어가기 어렵다는 주장, 그리고 경사노위에서 합의해 봤자 국회 가면 뒤집히니 필요 없다는 논리라면 민주노총과 산하 가맹조직이 참여하고 있는 모든 국가위원회에서 조직적으로 탈퇴하는 게 맞으며, 그게 논리적으로 일관된다.

노동운동 발전의 두 축은 동원화와 제도화, 즉 투쟁과 교섭이다. 노동운동은 이 두 바퀴가 튼튼해야 전진할 수 있다. 1987년 이후 노동운동은 조합원이 참여하는 동원화에는 성공적이었지만, 대표(representatives)가 참여하는 제도화에는 실패해 왔다. 조합원을 기반으로 하는 동원화는 강고한 자본의 지배체제에 균열을 내는 과정이며, 대표가 실력을 발휘하는 제도화는 균열된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싸울 수 있는 진지를 확보하는 또 다른 투쟁이다. 조합원들이 투쟁으로 만들어 낸 균열의 틈새를 대표가 비집고 들어가지 않으면, 지배체제의 균열은 다시금 메워지게 되고, 그 결과 대표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반복해서 같은 희생을 치르게 된다. 이러한 '무한도전'은 노동운동의 인력과 자원을 고갈시키고, 조합원들의 불신과 냉소를 초래하며, 사회적 고립과 경쟁력 낙후를 가져온다. 그리하여 계급투쟁의 큰판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노동운동 내부의 '지질한' 권력을 둘러싼 경쟁으로 노동운동가를 내몬다. 당연하게도 노동운동에서 계급 대중과 조합원은 사라지고, 정파들만 설치게 된다.

민주노총의 경사노위 불참을 결정한 지난 대의원대회가 좋은 사례다. '간선'으로 뽑힌 대의원들을 못 믿겠다는 논리로, '직선' 위원장을 통해 조합원들의 뜻을 관철해야 한다며 민주노총 지도부 직선제 도입에 앞장선 정파들이, 사회적 참여를 공약하고 조합원 66%의 지지율로 당당하게 당선된 직선 지도부의 방침이 정파 자신들의 이해와 충돌하자, '간선' 대의원들이 참여한 대의원대회를 통해 '직선' 지도부를 망신 주는 행태가 펼쳐졌다. 이들은 자기 정파가 아닌 지도부를 무력화시켰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실상은 80만 조합원, 나아가 2천만 노동계급을 무력화시킨 것이며, 노동운동 발전에 크나큰 장애를 초래한 것이다.

노동자 계층별 대표 3인은 경사노위로 복귀해야 한다. 명심할 것은 사회적 대화(social dialogue)에서 말하는 '사회'가 독점자본과 외세가 지배하는 사회라는 현실 인식이다. 그리고 '대화(對話)'는 회화가 아니다. 대화에서 방점은 '대(對)'에 찍히지 '화(話)'에 찍혀 있지 않다. 여기서 '대'는 대립과 적대의 그 '대'다. 상대와 동등하게 이야기를 하려면 상징적 대표성 뿐만 아니라 물리적 대표성도 있어야 하는데, 계층별 대표 3인은 상징적 대표성에 힘입어 경사노위에 참여하게 됐다. 전체 노동자의 10%를 유급 회원(paid membership)으로 둔 양대 노총도 90%를 방치한다고 비판받는데, 3인의 조직들은 그중 몇%나 유급 회원으로 두고 있는지 냉정하게 돌아보기 바란다. 3인 대표가 경사노위에서 대변하려는 사람은 합쳐 봐야 1만 명을 조금 넘는 자기 조직의 유급 회원이 아니라 90%의 미조직 노동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전 노사정위와 이번 경사노위가 다른 점은 '충실한 협의'를 보장했다는 점이고, 90%의 대표성을 상징적으로 보완하기 위해 계층별 대표 3인을 참여시켰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 기조는 문재인 정부 동안에는 유지돼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성과' 욕심을 버리고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경사노위를 통한 사회적 대화는 북미대화와 같다. 단계적·점진적·동시행동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 촛불로 허리가 동강 난 자유한국당 하나 처리 못하는 홍영표나 이해찬 같은 이들은 자신의 무능력을 숨기기 위해 '사회적 대타협' 운운하며 애드벌룬을 띄우지만, 북미회담에서 보듯 '재수 없는 콧수염' 볼턴의 '빅딜'이나 '원샷' 방식으론 답이 없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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