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차금봉 선생

차금봉(車今奉)은 1898년 12월8일 경성 화천동(현재 정동극장 근처)에서 아버지 차용진과 어머니 이성녀의 아들로 태어났다. 식민지 조선 대다수 민중의 삶이 그랬듯이 집안은 매우 곤궁했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미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짧은 가방끈이다. 1917년 4월 이후 용산 기관차 화부 견습공으로 일했고 1919년 3·1 운동 당시 철도기관사로서 노동자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조선노동문제연구회·조선노동공제회·조선노농총동맹·조선노동총동맹·신간회·조선공산당 등 1920년대 노동운동·민족해방운동을 관통하는 자리에 늘 있었다. 그랬기에 그답게 1928년 7월 체포·구속됐고 고문으로 1929년 3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그의 나이 만 31세 때였다.

 

“차금봉을 선두로 사람들의 물결을 헤치면서 앞으로 돌진…”

일제하 중외일보 기사에는 “어떤 중대 사건의 중요 간부였으나 학교에서 조직적으로 공부한 적은 별로 없는 인물이었다. 차금봉이 역사의 장에 등장한 3·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 그의 나이는 만 21살이었고 직업은 철도기관사였다”고 나온다. 토월회 출신 배우 박제행에 따르면 3·1 만세시위 때 자신은 “차금봉을 선두로 사람들의 물결을 헤치면서 앞으로 돌진했으며 차금봉의 권유로 지방으로 만세시위를 조직하러 나섰다가 일경에 체포됐다”고 한다. 차금봉은 이미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깊이 인식하고 실천투쟁에 앞장섰으며 노동자들을 지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1919년 3월2일 서울시내 노동자 400여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차금봉도 서울역을 중심으로 철도노동자와 자유노동자를 조직해 시위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돼 해고됐다. 당국의 이 같은 횡포도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드디어 3월22일 봉래(현재 만리동) 철도교차점 부근 음식점에서 "조선독립"의 피맺힌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침을 먹으러 온 잡역노동자들과 부근에 모여 있는 전차 차장·공장 직공·자유노동자·일반 시민이 하나둘 모여 700~800명이 함께했다고 한다. 이 시위를 주도한 사람이 바로 차금봉이다. 노동자들의 기세에 놀란 일경이 거칠게 막아섰지만 시위대는 기세 좋게 독립문까지 행진했다. 닷새 뒤인 3월27일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경성관리국 노동자들이 서울역 앞에서 ‘조선노동대회’ 또는 ‘조선독립’이 적힌 커다란 깃발을 내걸고 동맹파업까지 단행했다. 차금봉이 적극 조직해 이날 시위대 900여명 중에서 철도노동자가 800여명이었다. 시위는 5일간이나 계속됐다.

무려 200여만명이 참여한 거족적인 "조선독립만세"의 함성도 발톱까지 무장한 일제에 맞선 비폭력 무저항 노선의 한계, 정치적 지도의 부재, 민중의 의식화·조직화 부족 등으로 인해 어느덧 잦아들고 많은 인사들이 체포·고문·투옥됐다. 일제의 서슬 퍼런 폭압에 좌절하고 독립을 회의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3·1 운동을 통해 조선민중의 뜻과 힘을 체험한 사람들은 새로운 도약을 위해 계속 전진했다.

사회주의 성향 노동단체 간부 활동

3·1 운동 이후 1920년대에는 민족해방운동의 올바르고 편리한 도구로서 사회주의가 빠르게 확산됐다. 노동자·농민 단체가 전국 각 지역에서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차봉금은 1920년 2월 조선노동문제연구회 발기인을 거쳐 4월11일 조선노동공제회 창립멤버로 2회 정기총회에서 노동자 출신을 대표해 61명의 대표위원 중 1인으로 뽑혔으며, 1922년 9월 중앙집행위원장이 됐다.

조선노동공제회는 창립 당시 “노동은 사회의 근본”이라고 선언하면서 목적을 “자력으로서 자가가 의식(衣食)하는 동시에 애정으로써 상호 부조해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며 노동자 교육·경제·위생의 문제를 제기하며 최후의 이상은 우리 노동사회의 조직과 제도를 개선함에 있다”고 밝혔다. 창립 당시 회원이 678명이었는데 1921년 3월에는 1만7천259명에 이르렀다. 신문배달부·인력거부·지게꾼 등 자유노동자와 정미직공·인쇄공·연초공장 직공과 소작농까지 망라했다.

식민지 노동자들의 투쟁은 단순한 임금인상을 넘어 일제와 친일자본가를 대상으로 하는 민족해방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차금봉은 누구보다 조선독립과 새 사회를 위한 노동자 역할을 중시했다. 그러나 조선노동공제회는 상호부조 위주, 개별적 참여, 복잡한 구성, 지식인과 노동자,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생각 차이로 한계가 많았다. 차금봉은 지식인 지도부 교체를 주도하는 한편 현장체험에서 얻은 생생한 소재와 통속적 언어로 사회를 분석하고 운동의 나아갈 길을 밝혔다.

“신사토 양반들이 구두로나 필단으로 항상 조선은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으니 노동운동이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노동쟁의가 있다 하면 그것은 몇몇 소수 분자의 활동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나 (…) 생활을 유지해 가기 위해 자기의 노동력을 파는 이외에 생활에 필요한 물질을 얻을 수가 없는 소위 노동자라 하는 사회군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그들 노동자의 땀과 눈물의 결정이 내외를 물론하고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한 자본가의 주머니를 무겁게 하는 기본이 되지 않습니까?”

차금봉의 당시 신문투고 내용이다. 노동운동 시기상조론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비판, 노자관계 본질에 대한 그의 명확한 이해, 노동자들의 의식을 한 단계 끌어올리려는 그의 집념을 엿볼 수 있다.

노동공제회는 노동연맹회와 분열·약화된 채 1924년 4월 창립한 조선노농총동맹으로 귀속됐다. 차금봉은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서 1920년대 중반 한창 성장하는 노동운동을 지도하는 한편 이미 ‘서울청년회’ 출신으로 사회주의 활동을 본격화했다. 조선노농총동맹 강령은 노동계급을 해방해 새로운 사회를 실현하고 철저하게 자본가계급과 투쟁하며 노동자계급의 복리를 증진하고 경제적 향상을 꾀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다른 노동자와 농민이 혼재하고 여러 계파 사회주의자의 분파적 지도로 통일성이 낮은 데다 일제 탄압으로 합법적 활동이 어려워 1927년 9월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립됐다. 차금봉은 1926년 ‘3차 조선공산당’(ML당)에 입당해 이듬해 1월 경기도 책임자를 맡는 한편 노농총동맹 분립에 깊이 관여하고 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이 됐다. 중앙부서를 정비한 조선노동총동맹은 일제의 갖은 탄압 속에서도 적잖은 파업을 지도·지원했다. 차금봉도 1927년 11월 밀양 양화직공 동맹파업이 일어나자 이를 지지하는 격문을 보냈으며 파업을 선동하고 확대시킨 혐의로 일본 경찰에 검속되기도 했다.

차금봉, 일경 취조에 “노동은 신성한 것이므로”

차금봉은 1928년 3월 일제하 최대 연합단체인 신간회의 경서지회 설립을 주도하고 간사 겸 전국대회 출석 대표회원으로 선정됐다. 같은달 ‘4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 겸 경기도 책임자를 맡게 됐다. 철도노동자 출신이 비합법 정당의 대표가 된 것이다. 검거선풍 속에서 사태를 수습하느라 동분서주하면서도 3·1 운동 기념투쟁을 위해 당 일본총국에 선전 전단 20만장 제작을 지시하고, 그것이 실패로 끝나자 서울의 각 중등-전문학교에 독서회를 조직해 훗날을 대비하고자 했다. 특히 4차 조선공산당은 일제에 대응하기 위해 좌우공동전선인 신간회와 근우회의 활동지침을 마련해 활성화하려 했으며, ‘조선민족해방운동에 대한 테제’ 등을 마련해 자치운동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동시에 “조선민중은 자치가 아닌 보통선거에 기초한 조직적 국민회의를 획득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1925년 4월25일 창당한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네 차례에 걸친 검거선풍으로 와해되고 제3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이 해체를 지시해 차금봉 책임비서 시기인 1928년 12월7일자로 막을 내렸다. 당초 지식인과 소부르주아 중심의 한계로 노동자·농민 중심 대중정당으로 뿌리내리지 못했고 계파 대립과 갈등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노동자 출신 불굴의 혁명가이자 투철한 독립운동가, 차금봉의 활동은 한마디로 노동자 중심 대중노선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경에게 체포됐을 때 사회운동을 하게 된 이유를 취조받았는데,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므로.” 일경은 심문조서에 “겉으로는 온순하나 의지가 강고하다”고 적어 놓았다. 차금봉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1929년 3월10일 고문 후유증에 따른 심장성 각기증으로 옥사했다.

그가 죽은 후 당시 다섯 살 아들 윤호에게 보낸 한 장의 엽서가 신문지상에 공개됐다.

“윤호야 잘 있니. 할아버지 할머니 모시고 엄마하고 동생하고 일가 여러 어른들 편하시냐. 서너 번 엽서는 받아 보았으나 답할 근력도 없고 정신이 온전치 못하야 답장이 늦어진 것이다. 윤호야 이번에 지붓스(장티푸스)라는 열병에 하마터면 죽을….”

▲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사실상 아내에게 보낸 이 편지는 여기서 끝난다. 중외일보 기사가 일제 보도검열에 걸려 삭제돼 버렸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삭제된 차금봉의 삶과 넋이 독립된 나라에서 산다는 후손들에 의해 계속 죽임을 당하고 계속 삭제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남북화해협력의 시대, 한반도 평화번영통일의 시대에 이념 잣대로 독립운동 선열의 붉은 피를 더 이상 농단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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