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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환 시집 <등 뒤의 시간>] 잃어버린 등 뒤의 시간을 찾아서이인휘 작가

나에게 좋은 글이란 어떤 글일까?

▲ 이인휘 작가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나의 마음을 흔드는 글일 것이다. 예기치 못한 활자들이 파문을 일으키며 나를 끌어들여 반성하게 만들고 아프게 만들다가 혹은 저절로 미소를 짓게 하다가 파안대소하게 만드는 그런 글일 것이다.

갓 태어난 송아지를 혀로 핥아 주는
어미 소의 축축한 눈망울 속에서
새끼 소가 천천히 뒷다리를 일으키고 있다
혀의 쓸모는 말을 할 때보다 핥아 줄 때 더 빛난다


박일환 시인의 시집에 첫 번째로 실린 이 시를 보면서 감탄을 했다. 혀의 쓸모는 말을 할 때보다 핥아 줄 때 더 빛난다는 한 줄의 문장 안에 모든 생명을 대하는 진정한 삶의 태도와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수많은 반성의 언어들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첫 시에 사로잡혀 한참을 머물다가 다음 시를 넘기며 박일환 시인의 시심의 뿌리가 소의 축축한 혓바닥과 닮았다는 걸 도처에서 느낄 수 있었다. 시인은 그런 시심으로 수많은 사람과 사물과 사건과 언어들을 놀랍도록 다양하게 들여다보면서 우리가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펼쳐 놓고 있다. 책상과 책 속에서 끌고 온 생각이 아니라 힘겨운 발걸음을 마다하지 않고 몸으로 겪어 낸 것들을 사유로 되새기며 불러와 자유를 찾아가며 노래하고 있다. 그의 시가 어디서 시작돼 있는지 명쾌하게 보여주는 ‘사랑이 시작되는 자리’를 보면

(중략)
이 시대의 강력한 반동은 나부터 사랑하는 것이다
(중략)
체제와 이데올로기가 쳐 놓은 막을 찢어 버린 자리에서 사랑은 시작되고
그 길 끝에서 자유가 기다리고 있다


혀의 사랑을 온몸이 축축해지도록 바르고 그의 몸은 자유를 찾아 헤맨다. ‘천하일미 닭강정’ 간판을 보면서, 물오징어를 보면서, 너훈아를 보면서, 갈대와 달과 능소화와 꽃의 씨방을 보면서 사랑을 노래하고, 갑질을 질타하고, 소비문화에 찌든 삶을 질타하면서 고통스러운 현장을 찾아다닌다.

비틀어진 교육현장을 바로 세우기 위해 애를 쓰다가 세월호 아이들을 찾아 나서면서, 밀양의 송전탑으로, 폭력으로 얼룩진 유성기업의 민주노조로, 광화문 촛불현장으로 깊숙이 들어가 ‘국가라는 영구 임대주택’에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국가가 발부하는 각종 고지서와 출석요구서, 깨알같이 많은 성실의 의무를 강요’당하면서 사는 임대료 납부자들의 삶을 비통해하며 ‘정글시대 약사’라는 다섯 편의 연작시를 통해 권력과 국가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풍자화시켜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숨이 차면 시인은 시 밖으로 나와 시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나직이 말한다. ‘이 세상 수많은 시인들이 꽃과 나비와 바람과 빗방울 잡아다 시 속에 가뒀지만 아무리 시가 많아도 꽃과 나비와 바람과 빗방울보다 많지 않아서’ 여전히 바람은 나무들을 세차게 흔들고 빗방울은 허공을 헤매고 있다며 시가 차려 준 밥상을 물리고 힘겨운 현실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찾아가고 만나서 ‘시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 가여운 벌레들의 울음소리를 만나서 함께 울어 보자’고 한다.

오랜만에 시적 감흥에 젖어 시집을 읽었다. 서정과 서사가 넘나드는 시의 세계는 참으로 공간과 시간까지 다양하게 펼쳐 놓았다. 살기에 바쁜 나날 속에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것들을 시로 끌고 온 시인의 눈이 부럽고 고맙다.

어찌 몇 마디의 말로 시집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봄이 오는 소리가 도처에서 느껴진다. 생명의 숨소리, 그 탄생의 소리를 기뻐하기 전에 시인의 목소리를 한 번 느껴 보자.

봄이 와도
꺾여 나간 나뭇가지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
봄이 왔다고 부산한 이들 가운데
지난겨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기억하는 이 드물고
(중략)
그러므로 새순이 돋는 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기도 하지만
그 앞에 무수한 죽음이 있었다는 걸
슬쩍 밀쳐 내기도 한다

이인휘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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