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나는 1977년생이다. 그해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처음으로 1천달러를 돌파했다. 그리고 2018년, 41년 만에 3만달러를 넘어섰다. 명목 액수로는 약 30배, 달러 가치 변화를 감안하면 약 10배다. 물론 불평등이 심각하고 경제전망도 밝지 않아 언론에서는 성과보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가 많이 보인다. 나는 40여년간의 경제성장을 내 경험에 비춰 되돌아보려 한다.

77년 기억은 당연히 없다. 신문을 찾아보니 성과보단 “1천달러 시대에 걸맞은 의식개혁”이 강조되던 분위기였던 것 같다. 그런데 국민소득 1천달러를 돌파하자마자 한국 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빠진다. 오일쇼크로 세계경제가 공황에 빠진 상황에서 수출 중화학공업화 정책에 따라 자본을 과도하게 축적한 것이 문제가 됐다. 당시 중화학공업 기업들의 가동률은 50%에도 미치지 못했다. 자본생산성은 바닥을 쳤고, 기업 재무위기도 심각했다.

당시 경제성장은 관치금융을 이용한 막대한 자본투자 덕분이었는데, 이윤 없는 투자가 계속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와중에 박정희가 측근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어머니는 당시 티브이를 보며 펑펑 울었다고 기억하는데, 박정희가 죽은 것보다 나라가 망해서 전쟁이 날 것 같아서였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한국 경제는 97년 외환위기 이상으로 심각했다. 만약 미국의 반공냉전 자금이 없었다면 외환위기가 나도 몇 번은 났을 것이다. 전두환은 1980년 집권과 함께 미국 통화주의 정책을 따라 강도 높은 긴축을 시행했다. 경기침체가 더욱 심화했다. 그는 민주화운동, 그리고 긴축에 따른 국민 불만을 억압하기 위해 광주에서 시민을 학살했다.

국민소득이 2천달러를 넘어선 것은 83년이다. 미국의 역개방 정책 덕에 수출대기업들은 그럭저럭 위기에서 벗어났다. 우리 가족은 이즈음 연립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했다. 평수도 조금 넓어졌다. 84년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입학식장에서 대머리 교장선생님을 보고 전두환과 비슷하다고 소리쳤다가 부모에게 엄청 꾸지람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직 경제성장이 본격화하지 않은 이 시기, 친척 중 한 분은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났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한국보다 잘사는 나라였다. 그런데 그 친척은 운이 없었다. 이민 직후부터 세계적 경기회복과 3저 덕에 우리나라에서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 시작됐다.

자본생산성이 상승했고, 더불어 자본투자도 급격하게 증가했다. 경제성장률은 자본생산성 증가율과 자본스톡 증가율(투자로 이해하도 된다)의 합이다. 두 항목이 함께 지속적으로 증가한 시기는 현재까지 봐도 이때가 유일했다. 이런 고도성장을 경제적 토대로 삼아 87년 민주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대학생들 시위에 우유와 빵을 한 박스 사서 나눠 줬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다음해 올림픽이 개최됐고, 한국 경제는 정점을 찍었다.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가 열린 것은 94년이었다. 외환위기 전 90년대는 그야말로 “마이홈 마이카”로 상징되는 중산층 시대다. 우리 가족은 89년 평수가 더 넓은 고층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90년에는 드디어 자동차도 샀다. 90년부터 ‘구인난’이란 말이 언론지상에 흔하게 나왔고, 노동자 임금도 대기업·중소기업 할 것 없이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하지만 역사는 잔인했다. 한국에서 가장 평등하게 풍요했던 이 시기에 국가부도 씨앗이 싹트고 있었으니 말이다. 한국의 자본생산성은 3저 호황이 끝난 90년부터 하락세로 돌아섰다. 그럼에도 경제가 크게 성장했던 것은 자본투자가 80년대 이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재벌은 수익성이 급락하고 있었지만 대마불사 믿음으로 중복과잉투자를 확대했다. 정부는 새만금부터 고속철도까지 단군 이래 최대라 불리는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매년 발표했다. 하지만 수익성 없는 투자가 지속될 수는 없다. 나는 96년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3학년 때 외환위기를 경험했다. 당시 과 학생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후배들이 줄줄이 경제난을 이유로 군입대와 휴학을 하는 것을 보며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구조조정으로 해고된 친구 아버지가 퇴직금으로 피시방을 하다 망해서 그 뒤처리를 도왔던 기억도 난다.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는 2006년 시작됐다. 이때부터 국민소득 '몇만달러 시대'는 자랑할 만한 성과가 아니라 “그럼에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됐다.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 때문이다. 나는 사회운동을 오랫동안 한 탓에 2006년 졸업을 위해 대학을 재입학했다. 학교에 와서 가장 놀랐던 것은 강의 출석률이 거의 100%라는 것과 학교에서 술 먹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었다. 대학생활을 대충해도 어떻게든 취직할 수 있었던 90년대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외환위기의 경제적 피해가 복구된 것은 2002년쯤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듯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복구된 것은 아니었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는 외환위기 이후 부채부담을 털면서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해고된 노동자는 사업하다 퇴직금을 날려 먹고, 자식들은 학자금 대출과 취업난에 허덕이면서 그나마 취직도 비정규직으로 되는 헬조선에 떨어졌다.

국민소득 3만달러는 2018년 달성했다. 2만달러에서 3만달러면 50% 성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달러 가치를 감안하면 실은 그 절반이 안되는 23%다. 뭐, 그래도 어쨌거나 성장은 한 것인데, 외환위기 이후 성장은 이전과 다른 특징이 있었다. 자본생산성이 하락하는 가운데 자본투자도 감소하면서 성장률 자체가 이전보다 확 낮아졌다. 자본 전반의 생산성이 높아지지 않으니 극소수 수출대기업만 돈을 벌었다. 자본투자가 줄어드니 일자리가 늘지 않았다. 2000년대를 살아 낸 친구들과 술을 먹다 보면 반드시 두 가지가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는 주식투자를 하다 망한 이야기, 다른 하나는 그때 수도권 어디에 집을 사지 않아 후회한다는 이야기다. 자본생산성과 자본투자가 모두 감소세로 돌아서니 돈을 버는 방법도 생산적 노동보다는 투기에 집중된다. 사실이 또 그렇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떨까? 그다지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현재 대다수 시민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변화를 위한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경제성장 역사를 정확하게 분석하면서 말이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