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건강하던 서른 살 아들에게 백혈병이 찾아왔습니다. 땅이 꺼지는 듯하고 눈앞이 캄캄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어 그저 눈물만 흘렸습니다.”

고 임한결(사망당시 29세)씨의 어머니 유정옥씨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임씨는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삼성전자 사내협력사 ㅇ사에 다녔다. 가스감지기 설치가 임씨의 주요 업무였다. 임씨 유족은 그가 미세공정을 위한 클린룸에 간헐적으로 출입했고 벤젠·포름알데히드 같은 발암물질에 노출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입사 3년차가 되던 2017년 임씨는 급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임씨는 지난해 10월 숨을 거뒀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 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임씨를 포함한 14명의 산업재해보상을 신청한다고 밝혔다. 반올림의 14번째 집단 산재신청이다. 반올림은 반도체·엘시디(LCD) 사업장 노동자들이 입은 산업재해를 알리고 국가와 기업에 피해보상과 재발방지를 촉구해 온 시민단체다.

이날 산재를 신청한 노동자 14명은 모두 반도체·LCD를 생산하는 삼성전자 자회사나 삼성 사내협력사에서 근무했다. 반올림은 이들이 업무 과정 중에 비소·IPA(이소프로필알콜)·에폭시수지 등 유해한 화학물질에 노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재해자 손아무개(46)는 삼성디스플레이 사내협력사인 ㄷ사에서 2011년부터 일했다. 클린룸을 청소했다. 각종 유해화학물질에 고스란히 노출됐다고 한다. 그는 올해 1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손씨는 “각종 화학약품 냄새가 났지만, 무서움을 모르고 일만 열심히 했을 뿐인데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반올림은 “우리는 여전히 삼성이 어떤 공정에서 어떤 유해화학물질을 쓰고 있는지 모른다”며 “전자산업 직업병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중재안에 담긴 질병 규정이 협소하다는 비판도 나왔다. 이상규 반올림지원노무사모임 노무사는 "지원보상위원회가 보상대상을 질병코드로 규정하고 이에 부합하지 않으면 유사한 질병이라도 산재신청조차 받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삼성전자와 반올림은 지난해 11월 조정위원회의 중재안에 상호합의했다. 현재 두 기관과 독립돼 설립된 지원보상위원회는 보상신청을 접수 중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조정위원회 중재사항을 이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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