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심훈 선생

재학 중 3·1 혁명 참가, 옥고를 치르다

경성고보생 심훈(본명 심대섭, 1901~1936)은 3·1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1919년 3월1일의 파고다공원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어 벌어진 3월5일의 남대문 시위가 끝난 후 덕수궁 근처 해명여관 앞에서 일경에 연행돼 구속된다. 심훈은 1917년에 이미 일본인 수학교사와 갈등을 빚으면서 시험시간에 백지를 제출해 과목낙제로 1년 유급을 당한 경험의 소유자였다. 그런 심훈이 1919년의 3·1 혁명에 참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서대문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던 심훈은 한동안 자신의 구속 사실을 모르던 어머니가 고의적삼을 지어 차입해 주자 어머니에게 자신의 심정을 담은 <옥중에서 어머님께 올리는 글월>이라는 제목의 편지를 쓰는데, 열아홉 살 학생의 글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의연한 모습이 돋보인다.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해 근심치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에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해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심훈은 조선총독부의 검사와 판사의 심문 과정에서도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는다. 특히 판사 호리 나오요시(堀直喜)가 독립을 희망하는 이유를 묻자 “민족은 다른 민족으로부터 제재를 받지 않고 독립해 정치하는 것인데, 조선도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일가 단란하게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 교육제도가 불완전한 까닭으로 조선인은 생존경쟁의 패자가 돼 마침내 일본인의 노예가 되게 됐다. 또 조선에 대한 정치는 무단정치로서 문관까지 칼을 차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은 조선인을 적대시하는 것이다. 또 동양척식회사 등을 설립해 마치 영국이 인도에서 동인도주식회사와 같은 사업을 하고 있는 등 기타 여러 가지 불평이 있으므로 독립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하고 의연하게 답변한다. “장래에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 심훈은 숨기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또 할 것이다”고 당당하게 답변한다.

중국 망명, 이회영과 신채호에 영향받다

감옥에서 나온 심훈은 한때 일본 유학을 고민하기도 하지만, 결국 중국 망명의 길을 선택한다. 어색한 청복으로 변장하고 만주 봉천을 거쳐서 북경에 도착한 심훈은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유명한 우당 이회영(1867~1932)과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1880~1936)를 만난다.

무장투쟁론자 이회영·신채호와의 만남은 심훈의 사상 형성, 항일 문학작품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심훈이 프랑스 유학의 꿈을 포기하고 중국 항주에 있는 지장대학에서 이후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내는 엄항섭 등과 함께 공부하게 된 것도 두 분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훈은 신채호 선생이 일제경찰에 잡혀 여순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님 생각>이라는 시를 짓기도 하고, 단재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16년 전 만났던 애틋한 마음을 담아 <단재와 우당>이라는 수필을 남기기도 한다.

귀국, 연극과 영화에 빠져들다

심훈은 중국에서 3년간 망명 생활을 마치고 1923년에 귀국한다. 심훈이 비록 중국에서 귀국하면서 혁명가로서의 삶은 유보했을지 몰라도 이후 활동을 보면 우당 이회영·단재 신채호 선생에게 배운 비타협 정신은 변함이 없었다.

중국 망명 시절부터 연극에 관심이 높았던 심훈은 귀국과 함께 ‘극문회’라는 연극연구단체를 결성해 활동한다. 심훈이 초기 연극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것은 “연극이 가지고 있는 역동적인 대중적 호소력”에 매료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심훈은 이수일과 심순애로 유명한 영화 <장한몽>(1925)에서 직접 이수일 역으로 출연하는가 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1926)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기도 한다.

신문기사에서 힌트를 얻어 하룻밤 만에 쓴 시나리오로 감독 데뷔작인 무성영화 <먼동이 틀 때>를 제작하는데, 1927년 단성사에서 개봉된다. 영화 <먼동이 틀 때>는 1938년 조선일보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지금까지의 무성영화 부문’에서 5위(1위-나운규의 <아리랑>, 2위-이규환의 <임자 없는 나룻배>)로 뽑히기도 하는 등 두고두고 호평을 받는다.

심훈은 소설 <상록수> 역시 동아일보에 연재한 후 영화화하기 위해 직접 뛰어다니던 중 1936년 장티푸스로 불과 서른여섯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심훈이 끝내 만들지 못한 영화 <상록수>는 해방 이후 신상옥 감독(1961)과 임권택 감독(1978)에 의해 만들어진다.

소설 <상록수>로 이름을 날리다

심훈 하면 누구나 소설 <상록수>를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앞서 몇 편의 소설을 더 쓴다. 1930년 조선일보에 <동방의 애인>을 연재한 것이 본격적인 출발이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일제의 검열로 연재가 중단된다.

<동방의 애인>은 심훈 자신의 중국 망명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썼는데, 경성·상해·모스크바·동경 등을 무대로 하는 스케일이 제법 큰 작품이었다. 소설의 주인공(김동렬-강세정)이 유명한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심훈의 친구였던 박헌영과 그의 부인 주세죽을 모델로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어서 <불사조>를 새로 연재하지만, 이것 역시 일제의 검열에 걸린다. <불사조>는 일제에 맞선 옥중투쟁 장면이 문제가 됐다고 한다.

1933년에는 장편소설 <영원의 미소>, 1934년에는 장편소설 <직녀성>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다. 소설 <직녀성>은 봉건적 인습에 얽매여 결혼한 여성의 아픔을 소재로 한 작품이었다. 심훈은 이 작품에서 결혼·가족제도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억압과 차별 없는 새로운 형태의 남녀관계를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1917년 경성고보 시절 자신과 결혼한 철종의 후손 이해영에 대한 안타까움을 소설에 담았던 것이다.

박동혁과 채영신이 주인공인 심훈의 대표작 <상록수>를 쓴 곳은 충남 당진군 송악면(현 당진시 송악읍) 부곡리에 있는 필경사였다. 심훈이 당진으로 내려간 1932년에 쓴 소설 <직녀성>의 원고료로 본인이 직접 설계해서 지었다고 한다. ‘붓으로 밭을 가는 집’이라는 뜻의 필경사는 지금도 부곡리에 남아 있다.

<그날이 오면> 발표, 저항시인으로 자리매김

심훈은 자신을 시인으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식민지 조선인의 민족혼을 일깨우는 불후의 명작 <그날이 오면>을 남긴다. <그날이 오면>은 3·1 혁명 11주년을 기념해서 1930년 지은 항일 저항문학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다. 1929년에 있었던 광주학생운동과 원산노동자총파업, 용천소작쟁의 등도 <그날이 오면>을 짓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심훈이 얼마나 조선의 독립, 민족의 해방을 절절히 열망했는지 금방 느낄 수 있다. 심훈은 1932년에 그동안 쓴 시를 모아 <그날이 오면>이라는 제목으로 시가집 출판을 시도하지만, 일제의 검열로 결국 포기한다. 결국 시집 <그날이 오면>은 심훈이 그렇게 열망했던 해방이 된 후인 1949년에야 출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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