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재해보상보험법 입법목적은 업무상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하는 것이다. 업무상질병 판정 과정에서 공정성과 일관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신속성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업계 전문가들은 업무상질병 처리가 더디다고 비판한다. 60일 이내에 마무리하라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심의가 1천일 동안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직업환경의학전문의와 공인노무사들이 신속한 판정이 필요한 이유와 개선방안을 보내왔다. 4회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 최민 직업환경의학전문의(한국노동

안전보건연구소)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위원으로 일한 지 1년이 조금 넘었다. 질병판정위원이 된 뒤 산업재해 유가족들에게 업무상질병 판정 과정을 설명하면서, 심의 한 번 할 때 보통 10건 내외 사건을 다루는데 자료를 읽고 준비하는 데 하루가 꼬박 들고 3시간 정도(빠를 때는 2시간, 길 때는 4시간) 걸려 판정한다고 얘기했다. 나름 공을 많이 들이고 있다고 얘기한 건데, 오히려 깜짝 놀라며 “그 시간에 그 자료를 다 보고, 토론해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당사자들로서는 몇 달에 걸쳐 고민하고, 준비하고, 기다려 온 결정인데 한 건당 평균 20분이 채 안 걸린다는 것이 불안하기도 할 것이다. 재해 당사자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 시간을 들여 질병을 빠르게, 열심히 판정하고 있음에도 질병판정위에는 판정을 앞둔 사건들이 쌓여 있고 근로복지공단 직원들은 과로를 호소한다. 업무상질병이 좀 더 신속하게 판정되려면, 근본적으로 질병판정위가 심의하는 건수 자체를 줄여야 한다.

심의 건수를 어떻게 줄일 것인가? 지금도 충분히 드러나지 못한 업무상질병 산재보상신청을 막기라도 할 것인가? 오히려 업무상질병은 더 많이 드러나고, 더 많이 조사되고, 더 긴밀하게 예방정책과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나온 대안 중 하나가 업무상질병 추정의 원칙 도입이다. 산재보상신청이 흔한 질병은, 업무 부담이 큰 직종에 일정 기간 이상 근무했다는 증거가 확실하거나 업무 관련성이 잘 밝혀진 몇 가지 기준을 충족하면 곧바로 승인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흔한 근골격계질환 6가지(회전근개파열·요추간판탈출증·경추간판탈출증·반월상연골파열·수근관증후군·외상과염)에 추정의 원칙 적용을 위한 판단 기준이 이미 마련돼 있다. 고용노동부 고시로 돼 있는 뇌심혈관질환 인정 기준도 추정의 원칙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업무상질병 여부를 빠르게 판단하는 것은 재해자 권리 보호 측면에서뿐 아니라 조기 치료와 재활 복귀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필요한 제도적 개선방안이 이미 나와 있는데, 경총을 비롯한 일부의 어깃장으로 제도 도입이 늦어지고 있다. 추정의 원칙이 어서 도입·활용되기를 기대한다.

추정의 원칙 도입이 곧바로 처리 기간의 획기적 단축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별도의 승인 체계 등 행정적 보완이 필요하다. 추정의 원칙을 충족시키는 사건은 기존 질병판정위를 경유하지 않아야 처리 기간을 줄일 수 있다. 공단 지사에서 재해조사 후 추정의 원칙을 충족한다고 판단된 심의 건은 아예 공단 자문의가 승인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업무상질병은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 심의한다”는 법 규정 때문에 이런 변화가 어렵다면 질병판정위 내에 일종의 ‘간이심의회의’를 운영할 수도 있다. 지사 재해조사 후 추정의 원칙 해당 건은 간이심의회의에 제출하고, 질병판정위에서는 행정적으로 확인하는 역할만 수행하면 된다. 간이심의회의는 말 그대로 ‘추정의 원칙을 충족하는지’만을 살피면 되는 자리이므로, 구성을 간소화하고 한 번에 처리하는 사건의 숫자도 늘릴 수 있다.

업무상질병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근골격계질환과 뇌심혈관질환에서 상당수 사건이 이렇게 빠르게 해결되면 정식 질병판정위에서 다뤄야 할 심의 건수 자체가 줄어들게 된다. 질병판정위에서는 추정의 원칙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건의 업무관련성을 검토하면 된다.

추정의 원칙 도입은 신속성을 확보할 뿐 아니라, 업무상질병 승인 결과의 일관성도 높여 업무상질병 판정 절차에 안정성을 부여할 수 있다. 산재보상신청 건수와 판정 결과, 직업의학적 근거의 진전, 업무 형태나 방식의 변화를 모니터링하면서 추정의 원칙 기준을 지속적으로 다듬기 위한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 추정의 원칙 도입과 관련된 제도개선이 앞으로 업무상질병 판정 체계에 중요한 변화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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