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진하 금융노조 NH농협지부 위원장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석 달 전 국회 앞에서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밀실야합에 분노하며 투쟁을 결의한 한국노총이었다.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연장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이라고 했었다. 노사정 합의 하루 전 한국노총 위원장 인터뷰 기사를 통해 지도부의 흔들림 없는 투쟁의지도 확인했다. 노총의 긴급회의가 소집되는 걸 보면서도 걱정하지 않았다. 투쟁도 했고 약속도 했고 얼마 후 노총 선거도 있는데 노동자가 반대하는 짓을 할 수 있겠느냐며 안도했다. 그 안도는 반나절 만에 분노로 바뀌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탄력근로제를 논의하면서 제시했던 한국노총의 요구사항이 얼마나 실현됐는지 되짚어 봤다. 노동시간·휴게시간 특례 존치 5개 업종과 5인 미만 사업장 등 사각지대에 대한 대책은 합의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 다음 근로일까지 11시간 연속휴식권을 보장했다고 주장하나 노사가 동의하면 보장이 안 될 수 있도록 합의했다. 1주 24시간 연속휴식권이나 탄력근로제 연간 횟수제한도 빠졌다. 일·주·월·연 단위 최대 노동시간 한도도 정해지지 않았다. 미리 정해야 할 탄력근로 일정도 노사합의 없이 사측이 미리 통보만 하면 가능하도록 했다. 탄력근로제 실시로 삭감될 임금은 어떻게 보전할지 구체적인 보장방안은 없고, 임금보전을 않더라도 사측은 과태료만 내면 되도록 합의해 줬다.

한국노총의 요구사항이 거의 관철되지 않았는데도 하루아침에 지도부 입장이 돌변한 이유를 들어 봤다. 이렇게라도 합의하지 않으면 더욱 불리하게 강행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주효했다고 한다. 개탄스럽다. 여당과 야당과 사측이 야합해 놓고 따르라고 윽박지르면 노동자의 생존권이든 건강권이든 임금이든 불이익하게 변경되는 무엇이라도 노측은 따를 것인가.

민주노총이 경사노위 참여를 거부한 상태에서 유일한 노측 대표인 한국노총에 노총 소속 100만 노동자뿐만 아니라 나머지 1천800만 미조직 노동자까지 대표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주어졌다. 노동조합의 울타리가 있는 사업장은 노조가 탄력근로제에 합의하지 않고 버틸 수도 있겠지만, 노조 없는 노동자는 사측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는 것을 노조간부라면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번 합의서에는 미조직 노동자에 대한 대책은 한 줄도 찾아볼 수 없다. 한국노총 중앙법률원과 지역노동교육상담소를 통해 법률지원을 하겠다는 한국노총의 공언이 왜 이렇게 공허하게 들리는 것인가.

성난 시민의 궐기와 한국노총 조합원의 총의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60세 정년연장법을 형해화하는 임금피크제를 몰아붙이고, 노조가 동의해야만 도입할 수 있는 성과연봉제를 밀어붙였던 박근혜 정부의 악몽은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노동자는 기뻐했다. 앉은 자리가 바뀌면 보이는 풍경도 달라진다 했던가. 여당이 된 민주당의 정책은 야당 시절과 정반대로 돌변했다. 최저임금 인상을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로 형해화하더니 재벌규제의 상징정책인 금산분리를 대폭 완화했다. 4대강 사업이 무색할 정도의 토목예산을 타당성검토도 없이 쏟아붓겠다고 선언했고, 사장들의 요구대로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확대해야 된다면서 핵심 지지자였던 노동자의 건강권은 짓밟아 버렸다.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시간단축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근무상한제는 장시간 노동에 허덕이는 대한민국 노동자의 숨통을 틔워 줄 큰 진전이었고, 문재인 정부가 그토록 원하는 청년일자리 창출의 획기적 수단이었다. 그러나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된 탄력근로제 밀실합의는 노동의 역사를 거꾸로 되돌려 버렸고, 일자리 창출의 기회도 날려 버렸다.

앞으로 한국노총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모든 노동자의 단체협약인 노동법이 후퇴하도록 길을 터 준 지도부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노사정 밀실합의를 근거로 노동법이 개악되고 그 법이 노동자를 유린할 때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봄이 오는 소리가 투쟁의 함성으로 파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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