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탁 마실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어느 아이에게 물었다. “너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어떻게 생각하니?” 한 아이의 대답은 이렇다. “내가 원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에요. 왜 나는 내가 원치도 않은 삶을 살아야 하지요? 왜 이렇게 힘든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를 낳아 준 부모를 원망해요.” 또 다른 아이에게 물었다.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 아름다운 별에서 우주를 바라보며 느끼는 신비스러움을 어떻게 맛봤겠어요? 사랑하는 사람의 두 눈을 마주 보며 영원으로부터 밀려오는 행복이라는 감정에 어찌 젖어들 수 있었겠어요?”

대한민국이라는 땅에 태어난 것에 대해 물었다. “싫어요. 유럽에 태어났더라면, 아니 미국에 태어났더라도 이렇게까지 힘들까요? 이 나라에서 기대할 것이 없어요.” 또 다른 이에게 물었다. “저에게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사랑하는 부모님이 계시고, 함께하는 벗이 있어요. 제가 손을 내밀 수 있고, 또 맞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요.”

가상의 질문이고 대답이다. 하지만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이야기다. 세상의 의미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다가오지는 않는다. 많은 간극이 있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우리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 내기 위해 끊임없이 애를 써야 한다. “3포 세대, 5포 세대, N포 세대라고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희망을 포기한 세대예요.” 연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아들이 내게 한 이야기다. 분노하는 것도 아니고 절규하는 것도 아닌 담담한 어조의 이야기였다. 그 세대를 대표하는 말은 아닐지 모르지만, 실제로 많은 젊은이들이 그렇게 느낀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바꾸자고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뭔가 밑둥치가 뽑혀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비록 노동운동 현장을 떠난 지 꽤 오래됐지만, 스스로 살아온 내력을 돌이켜 보면 대부분 활동이 ‘권리’를 지키거나 얻기 위한 것들이었다. 소수자의 권리, 약자의 권리, 없는 자의 권리를 지켜 내기 위한 일들이 나와 비슷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내력이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도 그러했고 노동의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 소수자의 정치적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무거운 바위를 정상에 올려놓으면 굴러떨어져 다시 올려야 하는 노동을 반복하는 시시포스(Sisyphos)처럼 투쟁의 끝에는 늘 또 다른 투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열심히 싸우면 언젠가는 좋은 세상이 올 거라는 젊은 시절의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음에도 여전히 힘들어하는 자식 세대를 대하면 때로는 허허로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달려왔는가.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사회는 어떤 세상인가. 바쁜 삶 속에서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은 곧잘 잊힌다. ‘○○의 권리가 보장되는 세상’이라고 무수히 호명하지만, 그래서 만들어질 사회에 대한 기획을 자신 있게 내어놓고 있지 못하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 요즘 진행되고 있는 논의를 구체적으로 살피지 못한 탓일 수도 있으나 대안사회 담론이 많이 사라진 듯하다.

당장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직접적이고 절실한 요구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세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공감을 만들어 내기 쉽지 않다. 정작 새로운 사회의 상을 이야기하면 무슨 ‘~주의’로 환원돼 버린다면, 어떠한 풍부한 상상력도 기대하기 힘들다. 공공성 담론이 제기됐고 또 사회적 가치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 사회의 전면적 의제로 등장하고 있지 않다.

매 시대는 매 시대의 과제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거기에 따라만 가다 보면 자칫 길을 잃기 쉽다. 길을 걷다가 길을 놓치는 경험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전체 상을 두고 좌표를 설정하지 않아서 생기는 일이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질문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룰 일이 아니다.

사회운동 지도부들이 개별 주체의 권리 문제 못지않게 이제 다시 사회 문제를 전면에 내걸었으면 한다. 독재권력과 다수의 권위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우리는 훌륭한 권리주의자가 됐지만, 전체를 보고 사회를 설계하는 힘은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 대안적 사회를 이야기하고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획이 필요하다. 말은 쉽지만 대담한 용기가 필요한 기획이다. 공감은 주장이 아니라 소통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마실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htkim8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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