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훈 여행작가

팔자에 없던 칼럼을 쓰기로 하고 부딪힌 첫 장벽은 제목이다. 꼬박꼬박 출퇴근할 일 없어진 12년 전부터 어쩌다 여행을 좋아하게 됐고, 보통의 남들보다 자주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뚜렷한 색깔이나 주제를 두지 않은 ‘막 여행’이라 마땅히 붙일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네팔 포카라로 가는 카트만두 공항에서 기약 없이 미뤄지는 비행기를 기다리다 문득 오래전에 봤던 애니메이션 <에어리어 88> 속 주인공 대사가 떠올랐다. 용병 전투기 조종사였던 주인공이 전쟁터로 다시 돌아가면서 되뇌던 제법 폼 났던 독백. “화약 냄새가 그리워….” 물론 내 여행의 이유가 이 정도로 실존적이진 않지만 적당한 틈만 나면 가방을 싸는 이유와 통하는 구석도 있다. 그래서 만화 주인공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따라 해 본다. “여행 냄새가 그리워….”

달달달달달달~덜커덩 턱, 덜커덩 턱, 쉬이익 쉬익 쉭! 잠이 드는 둥 마는 둥 몇십 분을 버티지 못하고 눈을 뜬다. 천장에서 먼지를 잔뜩 붙인 선풍기 날개가 달달거리며 돌고, 아귀가 안 맞는 창문은 쉴 새 없이 열렸다 닫혔다 하며 찬바람을 들여보낸다. 창틀에는 그간의 여행객들이 청테이프 하나로 찬바람에 맞선 흔적이 덕지덕지 남아 있다. 이곳은 인도의 바라나시로 가는 기차의 3등 침대칸이다.

인도의 기차는 자신만의 특별한 느낌이 있다. 기차역과 기차, 철로의 생김새와 느낌이 모두 예스럽다. 여기에 인도 특유의 회색빛 먼지 공기가 시간여행 속으로 여행자를 끌어당긴다. 제국 영국이 만들고, 깔았던 바로 그 시간 속으로 말이다. 저가 항공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인도 여행에서 기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제법 크다. 인도 여행을 얘기할 때 기차를 빼놓고 얘기하면 단톡방에서 이모티콘 하나 쓰지 않고 문자만으로 정주행하는 것 같은 건조한 느낌이 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기차에 올라타는 일부터 쉽지가 않다. 도대체 언제 도착할 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제시간에 도착하는 일은 애당초 기대할 바 아니지만, 몇 시간이 넘도록 오지 않는 기차를 멍 때리며 기다리다 보면 옆에서 퍼질러 자는 길거리 개와 내가 구분되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그 흔한 안내방송 한 번 없는데도 역무원들에게 몰려가 불평하는 사람 하나 보기 힘들다는 것도 신기하다. 요즘은 기차의 현재 위치와 예상 도착시각을 알려 주는 스마트폰 앱이 생겨서 좀 덜 답답해지긴 했다. 예상시간이 점점 늘어난다는 건 함정. 아주 특별한 경우겠지만, 타야 할 기차에 승객이 너무 많이 타서 문을 안 열어 주고 떠나는 경우도 있다. 문을 열겠다고 매달리는 이들과 더 이상 못 탄다고 안에서 문을 잡고 막는 이들 사이의 실랑이를 보고 있자면 ‘이게 실화냐!’며 정신을 내려놓는 일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일단 기차에 올라타면 어떨까? 배낭여행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값싼 SL칸(3층 침대칸)에 탔을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문제없는 문제’-일명 No Problem 문제-는 좌석이다. 분명 내 좌석인데 다른 인도인들이 너무나 편한 얼굴로 앉아 있어서, 조심스럽게 표를 한 번 더 확인하고 나서 앉아도 되냐고 물어보게 된다. 자리를 차지한 이들이 “No Problem”이라며 궁둥이 한쪽 들어갈 자리를 내어주면 고맙기까지 하다. 이건 단지 시작일 뿐이다. 이어지는 후각을 마비시키는 엄청난 화장실 냄새, 덜덜거리는 창틈과 그 사이로 날카롭게 파고드는 한기 역시 별문제 없는 문제다. 이런 난감함 사이에서도 붙임성 좋은 인도 사람들은 진흙으로 만든 잔에 짜이 한 잔을 권해 온다. 어느새 그들과 손짓·발짓 섞어 가며 수다를 떨고, 사진도 찍어 가며 시간을 채울 수 있게 된다는 건 인도 기차 여행만의 특권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정겨움 속에서도 내 배낭을 튼튼한 쇠줄로 좌석 다리와 묶어 자물쇠로 잠가 둔 뒤의 얘기다.

좌석 등급이 4인실, 2인실로 올라갈수록 차비는 곱절 이상으로 올라간다. 특히 3층 침대칸에서 4인실 침대칸으로 신분 상승하려면 세 배 이상의 돈이 든다. 인도의 보통 사람들이나 가난한 배낭여행자들은 넘볼 수 없는 벽이다. 돈값을 하느라 ‘문제없는 문제’는 사라지고, 쾌적함과 조용함, 그리고 안전함까지 따라온다. 동시에 인도의 보통 사람들과 공짜 짜이 한 잔에 나누는 온몸 수다도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세상 이치가 그렇듯이 다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도 기차표를 사려면 꽤 공이 들었지만, 지금은 ‘ClearTrip’ 같은 웹 사이트를 통해 어렵지 않게 살 수가 있다. 깨어나고 있는 IT 강국 인도의 잠재력이 인도 여행을 또 어떻게 바꿔 놓게 될지 기대 반 걱정 반이다. 다만 너무 매끈해지지는 않았으면.

여행작가 (ecoc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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