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문재인 대통령마저 버린 소득주도 성장을 진보진영이 붙잡고 매달리는 형국이다. 정의당은 연초 자신들이 “소득주도 성장의 정통노선을 계속 걸어갈 것”이라 논평했고 민주노총은 “시작은 창대했으나 갈수록 미약해지는 문재인 정부 소득주도 성장 정책의지는 좀 더 다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논평했다. 보수세력의 정치공세에 문재인 정부가 소득주도 성장을 버렸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하지만 소득주도 성장은 단지 정치공세로 버려진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문제가 있어 도태되는 것이다.

소득주도 성장(또는 임금주도 성장론)은 어떤 점에서 시장근본주의보다 더 시장과 자본을 믿는다. 임금을 인상해 기업의 이윤을 줄이면, 기업이 투자와 기술혁신에 나서 이윤을 회복할 것이라고 믿으니 말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성장이 정체되는 것은 기업의 투자와 혁신 의지가 나태해진 탓이다. 그리고 임금인상은 기업의 혁신을 촉구하는 채찍이다. 정의당과 민주노총은 임금인상으로 기업에 혁신의 채찍을 휘두르자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오늘날 경제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기업이 혁신을 게을리했기 때문은 아니다. 기술혁신 자체가 곤란을 겪고 있어서다. 투자한 자본에 비해 이윤이 충분히 만들어지지 않다 보니 투자도, 경제성장도 어려워지고 있다. 연구개발생산성 저하, 노동생산성증가율 둔화 등은 선진국들에서 공통적으로 보고되는 바다. 당장 우리나라만 봐도, 자동차산업이나 조선업의 위기, 내수서비스부문의 낮은 생산성(특히 자영업)이 기업의 나태함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오늘날 경제상황은 소득주도 성장의 시장경제 낙관론보다는 마르크스가 말한 이윤율 하락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필연적 위기-시장경제 비관론과 더 잘 어울린다.

그렇다면 왜 정의당이나 민주노총은 이렇게까지 소득주도 성장에 집착하는 것일까? 내 생각에 사회주의적 지향을 내버린 상태로 분배문제 해결책을 제시하려다 보니, 그리고 노동자 내부의 심각한 격차와 조직노동의 지대추구적 행동들을 우회하려다 보니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사실 소득주도 성장에는 자본에도, 노동자에게도,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에게도, 최저임금 노동자에게도, 모두에게 불편하지 않은 해결책이 나열돼 있다. 그대로만 된다면 모두가 행복하다. 하지만 그런 해결책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사회주의를 이야기한 문제의식을 다시 생각해 보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근대의 약속인 평등·자유·풍요의 공동체를 끝까지 추구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자본주의에서 평등은 기회의 평등을 의미한다. 하지만 고도성장으로 무한한 기회가 제공되지 않으면, 즉 기회 자체가 희소한 상태가 돼 버리면, 이 평등은 공허해진다. 또한 자본주의에서 자유는 개인이 소유한 노동력과 자산을 거래할 자유를 의미한다. 하지만 거래의 결과는 자유의 제한이다. 강남 빌딩 부자와 폐지 줍는 노인은 모두 시장에서 자유를 가진 경제주체지만, 그들은 사회에서 결코 같은 자유를 향유하지 못한다.

자본주의에서 풍요는 기업의 이윤경쟁을 통해 달성된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을 보유한 기업에 의해 조직되기 때문이다. 기업의 목적은 죽으나 사나 이윤이다. 기업은 공동체의 풍요를 위해 생산하지 않는다. 이윤을 위해 생산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풍요가 달성된다는 것이 자본주의 원리다. 그런데 이윤이 충분하게 만들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공동체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생산설비는 가동을 멈춘다. 예로 자본주의에서 기업 이윤이 감소하면서 경제성장이 장기간 이어진 경우는 없다. 그런데 현재 경제는 이 이윤율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이전 봉건적 사회에 비해 평등·자유·풍요의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데 훨씬 효과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기회의 평등, 거래의 자유, 이윤을 통한 풍요는 스스로 모순을 가지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발전과 함께 그 모순이 심화된다. 우리 공동체의 모든 개인들이 충분하게 평등·자유·풍요를 누리려면, 자본주의는 반드시 지양돼야 한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당대 노동자에게 평등한 생산수단 소유(사회화), 자유로운 노동(노동권), 풍요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 생산(협동조합)을 지향하는 운동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우리가 보통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이런 사회주의적 지향에 따르면 진보진영은 분배에 관한 환상보다는 스스로 생산을 어떻게 조직할지, 그리고 그런 조직화를 위해 노동자 내부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지 구상해야 한다. 소득분배만 해 주면 나머지는 시장이 알아서 해결해 준다는 환상은 집어치우고 말이다.

예를 들면 족벌경영이 싫다고 주주나 펀드에게 경영을 감시하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거대한 재벌을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찾아야 한다. 노동자들이 경영과 생산에 관한 지식을 집단적으로 축적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저임금이 문제라고 정부에 법정최저임금을 크게 올리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임금소득 상위 15%에 속한 노동자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단체협약과 투쟁으로 저임금 노동자를 살릴 수 있을지, 대기업-중소기업, 수출산업-내수산업, 정규직-비정규직으로 나뉜 노동시장을 노동자가 주도하는 어떤 제도로 통제할 수 있을지 연구해야 한다. 먹튀 위험이나 구조조정에 처한 노동자들이 정부지원으로 상황을 모면할 것이 아니라, 그 기업을 자신과 사회가 어떻게 경영할 수 있을지 답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 같은 기술변화가 문제라면 일자리를 보장하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 사회에 필요한 지식을 달라고, 대학교육에 준하는 유급교육시간을 단체협약으로 요구해야 한다. 사회주의적 지향은 노동자가 생산을 재조직하는 주체가 되는 것으로, 노동자를 분배의 객체로 소외시키지 않는다.

나는 이 시대 진보진영의 위기는 이명박근혜 식 탄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문재인 정부식의 “공정한 시장”을 지지하다가 정권과 함께 몰락하는 것이 진보진영의 진정한 위기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진보세력에게는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던 사회주의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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