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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천막장동훈 천주교 인천교구 신부
▲ 장동훈 천주교 인천교구 신부

2011년 부산 영도, 김진숙이란 여인이 크레인 위에서 309일을 살았다. 2018년 서울 목동, 75미터 굴뚝 꼭대기에서 두 남자가 426일을 살았다. 땅으로 내려오던 여인은 사뭇 가벼워 보였고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7년 뒤 굴뚝에서 내려오던 남자들은 말이 없었다. 동료들의 부축을 받고 그제야 오열했다. 309와 426. 두 숫자의 차이만큼 세상은 더 잔인해졌고 인간은 더 비루해졌다. 공개된 파인텍 노사합의안은 실제로 노동 3권만을 느슨하게 보장할 뿐이었다.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이 얼마나 생존할 수 있을까를 경쟁하듯 날수만 더 까마득해진 셈이다. 309와 426 사이, 무수한 비인간의 숫자들이 다시 또 쌓였다.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13년도 끼어 있다. 얄궂게도 고통의 시간을 담은 숫자는 찌그러진 데 하나 없이 여전히 단정하다. 그래서 초현실적이고, 그래서 더 잔인한 것이다.

2011년 형들을 만났다. 2007년 정리해고 이후 대전 콜텍 노동자들이 인천으로 올라와 기계가 빠진 공장을 지키던 콜트악기 사람들과 함께 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물도 전기도 끊긴 공장에서조차 쫓겨난 것은 2013년 비가 내리던 늦겨울 아침이었다. 강제집행 당일 비를 피하기 위해 공장 정문 길 건너편에 쳤던 천막이 그대로 집이 됐다. 거기서 두 해를 살았다. 2015년 형들은 콜트·콜텍을 예로 들며 강성노조로 기업하기 힘든 나라가 됐다고 말한 집권당 대표에게 사과를 받아야겠다며 서울로 살림을 챙겨 올라갔다. 살림이래야 햇수를 더하며 늘어난 옹색한 그릇들과 이불더미, 천막 수리하는 데 도가 터 버린 손재주뿐이었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기대는 금세 실망이 됐다. 다른 장기투쟁 사업장들과 함께 광화문에 새 천막을 마련했다. 그리고 얼마 전 정년이 되기 전에 공장으로 돌아가겠다는 다짐과 함께 등촌동 콜트 본사 앞에 마지막 천막을 지었다. ‘마지막’, 형들에게 이보다 절박한 말이 또 있을까.

형들을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사를 함께 드리기 시작했다. 고립이 가장 두려웠다는 그들에겐 종교 따위는 상관없었나 보다. 텅 빈 공장, 어두운 이면 도로, 여의도 한복판, 광화문 네거리, 어디든 미사상도 따라다녔다. 그 옛날 이집트를 탈출해 황무지를 유랑하던 이스라엘 민족인 양 미사상은 항상 길 위에 있었다. 꼬박 아홉 번의 성탄이 지나갔고 그때마다 미사상 앞에 예수가 태어난 마구간을 그만큼 지었다 허물었다. 여물통 대신 세상의 온갖 아우성이 담긴 신문더미가 요람이 됐고 따듯한 불빛의 마구간 대신 파란 천막이 지붕이 됐다. 손가락 마디가 잘려 나가고 입술연지마저 지워진 때 묻고 노쇠한 아기예수상도 박스에 담겨 함께 이사 다녔다. 손가락 한 마디가 없는 경봉이 형, 그간 머리 위에 하얀 눈이 내린 재춘이 형을 닮았다. 아니 그들이 늙은 아기예수를 닮아 버린 것이겠다. 아니 함께 늙어 버린 것이겠다. 송전탑에 매달리고 전광판에 오르고, 땅을 기고, 곡기를 끊고, 기타를 치고, 오필리아가 되고, 책을 쓰고, 미사를 드렸지만 형들은 아직도 천막을 떠나지 못했다. 마지막 천막을 허물지 못했다.

단지 도망가지 않았을 뿐 강산이 바뀔 만한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했을까. 형들을 떠나지 못한 이유, 천막이 나를 붙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내 앞에서 형들은 꼭 두 번 울었다. 한 번은 쫓겨난 공장이 눈앞에서 헐려 나간 날이었고, 다른 한 번은 2014년 대법원 앞에서였다. 거금을 들여 회계법인의 자문을 구하고 유리한 증거를 마련하며 꼼꼼히 준비한 재판. 그날만은 함께해 줬으면 좋겠다는 말에 양복까지 꺼내 입고 함께 들어선 법정. 2분 남짓한 판결문 낭독이 끝났다. “미래에 닥칠 경영상의 위기를 대비한 정리해고는 정당하다”는 암호 같은 말이 전부였다. 이마저도 하찮은 인생들이 어찌 되든 상관없던 ‘재판거래’였다. 형들은 그날 신음하듯 울었다. 늦은 점심으로 짬뽕을 먹으면서도 울었다. 천막에 돌아와서도 울었다. 한밤이라도 천막을 찾는 내게 라면을 끓여 주던, 소임지를 옮길 때마다 화장지를 들고 집들이로 찾아와 주던, 나보다 항상 먼저 안부를 물어 주던, 자신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고 노예가 아니라 노동자라고 말하던 단단한 형들은 그날 거기에 없었다. 내가 떠나지 못한 이유. 그날의 눈물이 어떤 눈물인지 알기 때문이다.

지난 10년 우리의 집 역시 무수히 헐려 나갔다. 용산이, 세월호가, 백남기가, 김용균이 귀가하지 못했다. 정권이 바뀌고 공항과 같은 공공 분야의 직접고용이 시작됐고 KTX와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이 복직됐다지만, 사업주의 ‘회심’만을 기다릴 뿐인 개인 사업장의 시간은 여전히 가혹하다. 파인텍은 다시 한 번 살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야만의 역설을 거쳐야만 했고, 콜텍은 또 한 번의 마지막 천막을 지어야 했다. 한 사회를 판단하는 척도는 약자를 어떻게 대접하는지에 달려 있다 했다. 정부가 나설 때다. 아니 우리가 나설 때다. 그들이 마지막 천막을 짓고 허물기를 반복하며 기어코 마련하고자 하는 것은 귀가할 곳을 잃어버린 우리 모두의 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장동훈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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