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제성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1919년은 국제노동기구(ILO)가 창립한 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에서 채택된 베르사유 평화협정 13장이 바로 ILO 헌장이다. 왜 노동문제를 다루는 국제기구의 설립 헌장이 종전 후 국제질서를 재정초하기 위한 평화협정 속에 들어갔을까? 그것은 ILO 헌장이 스스로 밝히고 있다.

“항구적 평화는 사회정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 이 말은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사회적 불평등과 불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회정의가 실현되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난다는 인식은 과대망상이 아니라 경험에 근거를 둔 이성적 판단이었다는 것이 불행하게도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다시 한 번 입증됐다. 44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채택된 국제노동기구의 목적에 관한 선언(필라델피아 선언)은 그래서 이렇게 천명한다. “항구적 평화는 사회정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국제노동기구 헌장 속에 포함된 선언의 정당성은 경험에 의해 완전히 증명됐다고 확신한다.”

2차 세계대전 후의 국제질서는 바로 이 사회정의 정신 위에 재정초된다. 48년에는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됐다. 선진산업국가들은 복지국가를 건설했다. 노동자 권리는 강화됐고, 사회보장제도는 확대됐다. 불평등은 완화됐다. 그러나 80년대부터 사태는 반전됐다. 실업이 증가하고, 임금은 정체됐으며, 비정규직과 불평등이 확대됐다. 노동조합은 힘을 잃어 갔고, 기업의 힘은 전방위적으로 확산돼 갔다. 2019년은 ILO 창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불평등과 불의가 확산되고 있는 이때 이를 ILO의 핵심인 사회정의 정신을 되살리는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2019년은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3·1 혁명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를 천명하면서 신분질서 타파를 신생 공화국의 핵심 가치로 제시했다. 이것은 48년 제헌헌법으로 계승된다. 제헌헌법은 사회적 특수계급을 금지하면서 사회정의를 사회경제질서의 원칙이자 경제적 자유의 한계로 자리매김했다. 누구는 제헌헌법을 장식적인 헌법일 뿐이라고 비난하고, 누구는 바이마르헌법을 가져온 것에 불과하다고 폄훼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 그 헌법을 만들 때 사회정의를 핵심 가치로 천명하고 있는 문서를 전거로 삼았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곧 대한민국헌법 제정권자의 의지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5·16 쿠데타 직후 개정된 62년 헌법에서 경제적 자유를 사회경제질서 원칙으로 격상시키고, 역설적이게도 민주헌법으로 개정된 87년 헌법에서 “사회정의”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대신 “경제민주화”를 도입하면서, 사회정의는 헌법 문서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사라진 가치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신분질서의 대두다. 흙수저·은수저·금수저·헬조선 등은 한국 사회가 신분사회로 변질되고 있음을 경고하는 말들이다. 헌법(11조2항)은 여전히 “사회적 특수계급”을 금지하고 있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그러한 특수계급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느낀다.

한국은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겪었다. 산업화 시대에 “산업역군”으로 불렸던 노동자들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비로소 “노동자”라는 자기 이름을 되찾았다. 그러나 97년 외환위기 이후 노동자는 다시 “인적자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구조조정은 일상이 됐지만, 빈약한 사회안전망은 해고노동자들을 하늘로 올려 보내고 있다. 직장에서 차별은 일상이 돼 버렸고, 노동자의 존엄은 여지없이 훼손당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사회적 방파제로 인정받기보다는 마치 차별과 불평등의 주요 원인인 것처럼 매도당하는 시절이 됐다. 우리는 지금 기업과 시장이 인간의 행복과 사회의 공동선에 기여하는 시대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가 기업의 이윤과 시장의 자생적 질서에 복종해야 한다는 교리 선전이 목소리를 높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은 ILO 헌장과 필라델피아 선언이 천명했던 정신과 정반대 상황이다.

그래서 사회정의를 향한 국제사회와 대한민국의 오래된 꿈, 그 100년의 꿈을 되짚어 보면서 사회정의의 현재적 가치를 되살리는 것이 긴요하다. 이런 얘기들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jeseongpark@kl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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