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호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을 듣고 머리에 떠오른 단어가 '모순'이다. 사전(辭典)적 의미로 모순이란 "말이나 행동이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음"을 뜻한다. 중국 초나라 상인이 창과 방패를 팔면서 창은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다고 하고 방패는 어떤 창도 뚫지 못한다는 말을 한 데서 유래했다.

30분에 걸쳐 낭독한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문 내용은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가장 앞뒤가 안 맞는 것이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를 만들자”는 말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10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신년기자회견에서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사람중심 경제’와 ‘혁신적 포용국가’가 바로 그것입니다. 공정하게 경쟁하는 공정경제를 기반으로 혁신성장과 소득주도 성장을 지속시키면서 ‘함께 잘사는 경제’를 만드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미래의 희망을 만들면서,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같은 연설에서 “1997년 외환위기는 우리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사회안전망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맞은 경제위기는 공동체의 불안으로 덮쳐왔습니다. 우리는 온 국민이 합심해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경제를 성장시켰지만, 고용불안과 양극화가 커져 가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함께 잘살아야 지속 가능한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닙니다. 지난 20년 동안 매 정부마다 경제성장률이 낮아지면서 충분히 경험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그는 그동안의 추세로 미뤄 볼 때 경제가 높은 성장률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를 만들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난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경우를 말하는가. 고 정주영 현대재벌 총수처럼 시골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상경해 고생고생을 겪은 후 대재벌이 되는 것을 말하거나, 가난한 노동자·농민의 자식이 공부를 잘해서 사법고시에 합격해 판·검사가 되고, 이후 장관이나 국무총리 같은 정부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이런 벼락출세가 가능한 것은 마르크스 경제학을 빌려 설명하면 자본주의 사회 성립의 전제조건인 집적된 부를 폭력적인 수탈을 통해 획득하던 이른바 ‘원시축적’ 시절이나, 공장제수공업 단계를 거쳐 기계제 대공업이 등장하는 1차 산업혁명 기간의 고도성장기에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유명한 공상적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언은 이 산업혁명기에 큰돈을 벌었다. <반공산주의선언>을 쓴 로스토 같은 부르주아 경제학자는 경제발전이 ‘전통사회-도약준비단계-도약단계-성숙단계-대량소비단계’의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했는데, 이 가운데 도약단계에서 성숙단계에 이르는 과정에서 고도성장이 이뤄진다고 했다. 그리고 이 고도성장 단계에서는 기존 대자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소농민이나 수공업자가 소자본으로 되고 나아가 대자본으로 도약할 가능성이 많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른바 ‘민주정부’를 포함해 지난 20년간 매 정부마다 경제성장률이 낮아져 왔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우리 경제가 이미 고도성장기를 통과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개천에서 용이 날 기회도 매우 좁아졌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그는 같은 연설에서 한 곳에서는 고도성장이 아닌 저성장이 현실의 추세라고 말하면서 다른 곳에서는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를 만들자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연설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소수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 벼락출세를 해서 돈과 권력을 가진 엘리트가 되는 사회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 1%의 엘리트가 존재하는 사회 자체를 반대한다. 엘리트의 자식이 대물림해서 엘리트가 되는 사회나, 엘리트가 아닌 산동네 빈민의 자식이 엘리트가 되는 사회나 천민자본주의 계급사회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지금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나 그들과 가까운 고위관료와 기업 전문경영자 가운데는 후자의 경우가 많다. 그들은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처럼 부잣집 자식은 아니지만 그들도 계급적 정체성은 민중이 아니라 엘리트며 반 노동자·민중이다.

십분 그의 말을 내재적으로 이해해서 4차 산업혁명 같은 분야에서 벼락부자가 나타날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첨단기술 분야에서 새로운 기술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그 자신이 상당한 자본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십중팔구 스스로 대자본이 되지 못하고 대자본에 자신의 기술을 팔아야만 할 것이다. 요컨대 그는 가난한 집 자식도 머리만 좋고 노력만 하면 1%의 큰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환상을 퍼뜨리고 있다.

그의 연설에는 또 하나의 모순이 있다. 그는 한편에서는 소득주도 성장과 그것의 다른 이름인 포용국가를 말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혁신성장을 말하고 있다. 이 둘을 짜 맞춰 ‘혁신적 포용국가’라는 말을 만들어 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혁신은 규제혁신이거나 기술혁신인데, 규제혁신은 규제철폐고 기술혁신은 대체로 노동을 절약하는 기술혁신이다. 이런 규제혁신과 기술혁신이 일어날수록 노동자의 고용과 소득은 줄고 부와 소득의 양극화는 심화한다. 그런데 어떻게 혁신성장을 이루면서 동시에 함께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인가. 그는 초나라의 상인처럼 한 입으로 서로 상충하는 두말을 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말을 내재적으로 이해하자면 혁신성장으로 생겨난 성과를 사회안전망을 통해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에게 재분배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함께 잘사는 사회에는 사회복지나 사회보장이 존재하지만 사회안전망 같은 병 주고 약 주는 처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처방은 전형적으로 신자유주의식 처방이다. 그런 알량한 처방을 놓고 “사람중심 경제” “더불어 잘사는 나라” 운운하는 것은 좋게 말하면 포장이요 나쁘게 말하면 속임수다.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seung7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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