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현철 직업환경의학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지난 연말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을 두고 벌어진 막전막후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도대체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2018년 벽두에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밝힌 ‘국민 생명 지키기 3대 프로젝트’ 일환으로 2022년까지 산업재해 사망(사고사망만인율)을 절반으로 줄이고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이 보장되는 일터를 조성하기 위해 ‘산재 사망사고 감소대책’을 수립해 발표했다. 국회에도 서울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가 숨진 열아홉 살 하청노동자의 죽음을 계기로 발의된 것을 비롯해 무려 24건의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제출됐다.

그런데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차곡차곡 쌓아 묵혀 둔 각종 개정안들과 그것에 대한 정부의 화답이라 할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이 결국 본회의에도 오르지 못할 지경이 돼 갔다. 지하철역 스크린도어에 끼여서, 조선소 크레인에 깔려서, 소화기 약제를 충전하다가, 도금조에 화학약품을 넣다가 그렇게 노동자들은 계속 죽고 쓰려져 갔지만 법 개정은 지체되고 사람들은 지쳐 갔다. 일터의 안전은 삶이자 생활의 영역이지만 그것을 지켜 내기 위해 필요한 법률과 제도들이 결정되는 것은 오롯이 정치의 영역이 돼 있었다. 좋다, 그렇다 치자. 당사자로서 노동자들의 노동권, 생명권, 건강권, 작업중지·거부권 요구가 바로 정치와 만나지 못한다면 생활과 정치의 영역을 제대로 잇는 것이 정치인의 역할이었을진대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취지와 위험과 생명 문제는 온데간데없어졌다. 기업의 입장, 경제적 이해관계의 충돌만이 관심이 돼 무능한 정치와 함께 제도는 표류하고 있었다.

노동자들 특히 소규모 사업장, 하청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더 많이 상하고 더 많이 다치더라도 당사자들은 정치 영역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 “나 김용균은 화력발전소에서 석탄설비를 운전하는 비정규 노동자입니다. 노동악법 없애고 불법파견 책임자 혼내고 정규직 전환은 직접 고용으로.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 이제는 영정으로 남은 사진 속에서 손팻말을 들고 대통령에게 호소하는 것이 그를 포함해 위험한 현장에서 필사의 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하청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참여의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죽음에 이르러서야 노동자의 이름으로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가 죽음에 이르러도 기성정치는 납치범들이나 할 만한 목숨값 흥정을 벌이거나 야당 탓 여당 탓에 바빴다.

제대로 된 정치의 실종은 어머니를 한겨울 길거리로 나서게 만들었다. 스물넷 하청노동자가 일하다가 컨베이어 롤러에 몸이 갈려 목숨을 잃었다. 하나뿐인 아들의 죽음 앞에서 애끓는 모성은 분노로만, 절망감으로만 향할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거리에 섰고 청와대를 향한 행진에 앞장섰고 국회로 향했다. 아들의 육신만큼이나 갈가리 찢긴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그 어머니가 나서야만 했다. 또 다른 아들들, 노동자들의 죽음을 막고자. 어쨌거나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은 국회를 통과했다. 김용균의 죽음이 없었다면, 그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려는 어머니의 애씀이 없이는 아마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여전히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은 진전이다. 개인적으로는 두 가지 과제가 남아 있다는 생각이다. 첫째는 이번 법 개정 과정을 톺아봐야 한다. 왜 2년이나 넘게 개정안들은 논의조차 되지 않고 서류로만 존재했는지, 위험을 경고하고 제도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들 목소리는 왜 정치와 닿지 않았는지, 도대체 국민의 생명과 안전조차 지키지 못한다면 정치란 무엇인지, 과연 삶과 정치의 영역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인지.

둘째로 산업안전보건법이 현실에서 제대로 구동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했지만 선한 신도 디테일에 있다고 했다. 악마처럼 집요하게 디테일을 확인하고 디테일의 선의를 찾아가는 것은 상당부분 전문가들 책임이다. 제도와 법률이 현실과 접해 실현되거나 혹은 좌절되는 바로 그 지점, 그 현장에 서서 듣고 바라보고 확인하고 채워 가야 한다.

둘 모두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는 것에서 출발해 사업주를 포함한 당사자의 현실을 꿰어 봐야 가능한 일이다.

칼럼을 쓰는 와중에 우울증과 불안장애 환자들을 위해 애쓰고 많은 학술적 성취를 이뤘던 정신과 의사 한 분이 병원에서 환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병원은 의료인들과 병원 종사자들의 일터다. 하청노동자건 전문의건 생명의 무게에 경중이 있을 리 없다. 안전하게 일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소중한 법이다. 애초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에서 근로자가 “일하는 사람” 모두들 대상으로 삼았던 취지이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들도 발전소 협력업체 노동자들도 ‘노무를 제공하는 자’에 해당하겠으나 “일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채택되지 못한 점이 아쉽기만 하다.

2019년이다. 지나갔다고 모두 낡은 것은 아니며, 다가온다고 모두 새로운 것은 아니다. 2016년과 2017년의 촛불의 의미가 아직 낡은 것이 아니듯 개정된 법률도 그 자체로 새로운 것일 수는 없다. 부디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이 다른 아들들을 죽음으로 내몰지 않도록 만들고 싶었다는 어머니의 바람에 미치도록 두고두고 살펴야 한다. 우리 모두의 몫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