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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승무원·쌍용차 해고자 복직투쟁 이야기] 주변 맴도는 죽음, 부조리한 현실, 해고노동자 지탱한 심지는 '연대'
▲ 정기훈 기자

10년의 세월은 두 해고노동자의 마음에 ‘심지’를 새겨 넣었다. 답답한 현실은 발화물질이었다. 참을 수 없는 열기에 불길이 일 때면 동료 해고자들은 물론 사회의 가장 아프고 서러운 곳으로도 눈길이 가고 온기가 퍼졌다. 투쟁이 길어지는 사이 그들의 목적은 복직이 아닌 공존이 됐다.

‘지상의 스튜어디스’를 꿈꾸며 사회에 첫발을 디딘 청춘이 이제는 30대 후반 나이가 됐다. 동료들을 짓밟고 살아남기보다는 차라리 해고자의 길을 택한 공장노동자는 내일모레 지천명에 접어든다. KTX 해고승무원이었던 정미정(37)씨와 쌍용차 해고노동자 윤충렬(49)씨 얘기다. 두 사람은 10년 혹은 10년을 훌쩍 넘긴 투쟁 끝에 올해 복직에 성공했다.

<매일노동뉴스>가 정미정씨와 윤충렬씨를 만나 오랜 복직투쟁의 면면을 돌아봤다. 현장으로 돌아가게 된 소감과 계획을 들었다. 인터뷰는 이달 20일과 27일 서울 상암동의 한 커피숍과 서울 신길동 비정규 노동자의 집 꿀잠에서 각각 진행됐다.

'지상의 스튜어디스' 꿈꿨건만…

정미정씨는 현재 경기도 고양 행신역에서 일하고 있다. KTX를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열차가 승객을 싣고 오가는 곳이다. 그는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정규직이다. 올해 9월10일 대전 코레일 본사에서 면접을 본 뒤 약 두 달간 교육을 받고 이달 17일부터 업무에 배치됐다.

12년 만에 원청 직접고용의 꿈을 이뤘지만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그는 3조2교대제로 일한다. “어제 날을 새고, 낮에 잠깐 잠을 자고, 다시 밤을 새고 오는 길이에요. 승무원으로 일할 때에는 열차 스케줄에 맞춰 움직였는데 늦어도 새벽 1시 종착지에 도착하면 업무가 끝나곤 했죠.”

대학에서 아랍어를 전공한 정씨는 외국항공사 승무원이 되고 싶었다. 졸업할 무렵인 2004년 KTX가 개통했다. 그가 취업정보를 보기 위해 가던 인터넷카페에는 그야말로 붐이 일었다. ‘지상의 스튜어디스’ ‘단군 이래 최대 국책사업’ ‘준공무원 보장’ 같은 달콤한 말들은 여러 스튜어디스 지망생들을 KTX 승무원 채용시험에 지원하게 만들었다. 정씨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KTX 1기 승무원으로 합격했다. 경쟁률은 14대 1이었다. 스물네 살 때다.

“사기업이나 외항사보다는 나라에는 운영하는 KTX에서 일하면 근무환경도 훨씬 좋고 일도 보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시 철도청(현 코레일)은 홍익회(현 코레일유통)에서 1년을 일하면 정규직으로 전환된다고 약속했고요.”

한창 꿈에 부풀 시기였다. 당시만 해도 그때 선택이 12년에 걸친 복직투쟁의 시작이 될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경찰 폭력진압 부당성 알리려 기습시위

윤충렬씨는 1993년 군대를 전역하고 그해 10월부터 쌍용차에서 일했다. 아버지 친구의 권유로 지원했다가 일을 시작했다. 입사 후 곧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부산정비사업소로 발령 났다. 2001년에는 쌍용차 평택공장으로 올라와 코란도 생산라인에 몸담았다. 그에게 쌍용차는 가정을 지키고 한 사람의 가장으로서 제 역할을 하게 만드는 버팀목 같은 곳이었다. 물론 쌍용차가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나서기 이전까지의 얘기다. 쌍용차는 2009년 대규모 인력감축안을 발표했다. 전체 인력의 40%에 가까운 2천646명을 구조조정한다고 했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는 조합원 84% 찬성으로 파업을 가결했다. 그해 5월21일 쌍용차 평택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에 돌입했다. 보수언론과 이명박 정부는 융단폭격을 퍼부었고 파업에 대한 여론은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윤충렬씨는 당시 파업을 이끌었던 한상균 전 지부장의 요청에 따라 7월 초 동료들과 함께 공장 밖으로 나왔다. 서울로 올라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이유와 목적을 설명하는 대시민 선전전을 펼쳤다. 얼마 후 경찰특공대가 투입돼 폭력과 테러장비가 동원된 살인적인 집압이 이뤄졌다. 그는 공장 담벼락 바깥에서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밖으로 나오면 출입이 통제돼 다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어요. 최루액을 살포하기 위해 공장지붕을 향해 날아가는 헬리콥터나 폭력에 희생당하는 동료들의 신음소리를 그저 밖에서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마음이 너무 답답했습니다. 열불이 났습니다. 차라리 공장 안에서 그 순간을 함께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는 경찰 폭력진압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당시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고가차도에서 기습 고공시위를 하다 3시간 만에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철도공사 '정규직 전환 약속 모르쇠'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정씨는 취업 후 1년이 훌쩍 넘도록 여전히 홍익회 소속이었다. 2005년 말부터 정씨와 KTX 여승무원들의 고용안정과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철도공사는 계약기간 2년이 도래한 2006년 3월 여승무원들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철도노조와 노조 KTX열차승무지부가 곧바로 파업에 나섰다.

코레일은 여승무원들에게 또 다른 자회사인 KTX관광레저(현 코레일관광개발)에 가서 일할 것을 요구했다. 전체 승무원 350여명 중 280여명이 이를 거부했다. 그들은 그해 5월 전원 정리해고됐다.

“해고를 전후해 3년 동안 동료들과 합숙하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본 것 같아요. 한명숙 당시 국무총리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국회헌정기념관을 점거한 적이 있어요. 아직 봄이 오지 않아 무척 추운 시기였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누워 신문지 한 장으로 밤을 버텼어요. 다음날 검은 헬멧을 쓰고 나타난 경찰들이 커다란 검은색 방패를 높다랗게 치켜든 뒤 위협하듯 바닥을 향해 내리찍는 거예요. 그때 느꼈던 공포가 아직까지 생생합니다.”

정씨는 2008년 8월 오미선 당시 KTX열차승무지부장과 함께 서울역사 내 40미터 높이 조명철탑에 오르는 고공농성을 했다. 철도공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나둘 지친 이들이 생업을 찾아 나섰다.

정씨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34명의 여승무원들은 그해 11월 철도공사를 상대로 해고무효와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냈다.

다시 복직투쟁 이끈 동료의 죽음

윤충렬씨의 복직투쟁에서도 고비마다 법적 다툼이 이어졌다. 그는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에서 이른바 ‘살아남은 자’였다. 그는 회사가 2명 중 1명꼴로 선정한 정리해고 대상자에 포함되지 않았다. 다만 동료들이 흘리는 피눈물을 옆에서 지켜보다 못해 파업에 앞장서고 이를 이유로 징계해고됐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지만 당시에는 회사가 어려우면 해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문제는 기준인데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어요. 예를 들어 그해 진급했던 사람들은 다 정리해고 대상자가 된 거예요. 진급을 못한 사람은 대상자에서 제외됐죠. 거꾸로인 거죠. 혼자서 살길을 찾을 수 있는 총각이라는 이유로 정리해고 대상자가 되기도 했어요.”

그가 정리해고 대상자가 아님에도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부당해고로 인정받고 언제든 공장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40여명의 동료가 징계해고됐는데, 이 중 절반가량이 대법원에서 부당해고 확정판결을 받아 냈다.

윤씨도 소송에 나섰다. 하지만 5년간의 법적 다툼 끝에 대법원은 회사의 징계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던 그를 다잡은 것은 동료의 죽음과 이를 계기로 실감한 주위의 따뜻한 응원과 관심이었다. 2012년 3월 쌍용차에서 22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과거 옥쇄파업에 참여했던 해고노동자 이아무개씨였다.

“심리치료를 받고 싸우는 동지는 괜찮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싸우던 동지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 모두 큰 충격을 받았어요. 더 이상의 죽음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차리게 됐어요. 제가 분향소를 지키고 있을 때 수많은 시민이 찾아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눈물을 보이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편의점 알바를 해 모은 돈을 성금으로 가져오시는 분들도 있었어요. 그때 ‘쌍용차 문제가 내 문제만은 아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때의 경험이 복직투쟁을 포기하지 않게 만든 것 같습니다.”

기나긴 복직투쟁 '해고는 살인' 증명

‘해고는 살인’이라는 명제가 현실로 증명된 곳은 쌍용차에서만이 아니다. 소송전에 나선 KTX 여승무원들은 코레일을 상대로 1심과 2심에서 모두 승소했다.

법원은 KTX 승객서비스 업무를 위탁받은 철도공사의 자회사가 사업독립성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코레일과 여승무원들이 묵시적 근로계약관계를 맺고 있다고 봤다. 그런데 2015년 2월 대법원 판결에서 결론이 뒤집혔다.

“정말 말도 안 되는 판결이었어요. 증거가 차고 넘쳤어요. 판사들이 정말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판결이었는데 우려가 현실이 됐죠. 현실을 인정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고, 후폭풍이 오래갔습니다.”

법원이 판결을 뒤집으면서 여승무원들은 그동안 받았던 임금에 지연손해금을 합해 1인당 1억원을 빚지게 됐다. 정씨가 친언니처럼 대했던 박아무개씨가 대법원 판결이 난 다음달 충남 아산의 한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숨졌다.

“정말 친하게 지낸 언니라 충격과 마음의 상처가 컸어요. 투쟁이라면 괴롭고 힘든 것만을 떠올리는데 그 언니가 있어서 즐거울 수 있었습니다. 투쟁한다고 20대 여성이 아닌 것은 아니잖아요. 한 번은 집회에 귀걸이를 하고 갔다고 혼난 적이 있는데, 언니와 저는 생각이 굉장히 잘 맞았어요. 둘 다 부산사람이에요. 투쟁을 하면서 얻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 수다 떨고, 서울 구경을 하러 다닌 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미완의 투쟁' 다시 공장으로

쌍용차 정리해고 판결도 KTX 여승무원 재판과 유사한 형태를 뗬다. 서울고법은 2014년 2월 “쌍용차 정리해고가 긴박한 경영상 필요성을 갖추지 못했다”며 무효라고 선고했다. 그런데 대법원은 불과 9개월 후 이를 뒤집는 판결을 내렸다. 올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상고법원 설립을 위해 청와대와 재판거래를 한 정황이 포착됐는데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과 KTX 여승무원 사건이 대표적인 재판거래 대상으로 지목됐다. 이 같은 분위기는 오랜 기간 교착에 빠졌던 두 사업장 복직 논의에 불을 붙였다.

철도노조와 KTX열차승무지부, 코레일은 올해 7월 KTX 해고승무원 복직에 전격 합의했다. 두 달여 뒤인 9월에는 쌍용차지부와 쌍용차노조·쌍용차·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내년 상반기까지 해고자 119명 전원을 복직시키기로 합의했다.

정미정씨는 김승하 지부장과 함께 교섭위원으로 참여했다.

“새벽까지 조합원 4~5명이 천막농성장에 남아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많이 마음을 졸였는지 결과를 듣고 제대로 울지도 못하더라고요. 서로 고생했다며 다독였습니다. 원하는 방식으로 마무리가 됐으면 좋았겠지만, 너무 긴 시간이 지났어요.”

정씨는 복직이 결정된 뒤에도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10년이 넘는 싸움에 혼신을 다하느라 몸과 마음이 지쳐 버린 탓이다. 하지만 자신과 후배들이 처한 현실이 그를 다시 노동현장으로 돌아오게 했다고 한다.

“KTX 여승무원들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어요. 승객의 안전을 점검하는 업무는 12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외주화돼 있어요. 투쟁하며 가슴 아프고, 힘든 일을 많이 겪었지만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믿음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마지막엔 활짝 웃는 길을 향해 나아가고 싶습니다.”

윤충렬씨를 포함한 쌍용차 해고노동자 119명 중 71명이 31일 공장으로 돌아간다. 윤씨는 “잘못된 해고기간에 대한 근속 인정이나 보상이 없다는 점은 아쉽다”고 말했다. 그는 “쌍용차 사태를 계기로 노동자는 일회용 부품이 아니며 정리해고는 살인이라는 점이 사회적으로 각인되길 바란다”며 “정부가 쌍용차 사태를 촉발한 외국자본의 기술유출과 먹튀 대책을 마련하길 바란다”고 주문했다.

“공장에 돌아가서 첫 월급을 타면 지금껏 도와주시고 연대해 주신 분들을 위해 쓰고 싶어요. 그 다음에는 십일조하듯 버는 돈의 10%를 투쟁 사업장을 위해 쓸 겁니다. 긴 복직투쟁을 하며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각자가 제 위치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로 조금씩 연대하는 것에서 사회가 변하지 않을까요?”

양우람  against@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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