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혁림, <한려수도의 추상적 풍경>, 캔버스에 유채, 2005년, 용인 이영미술관.
이유리 <화가의 마지막 그림> 저자

“전혁림 화백이 여태 살아 있었어?”

1979년 미술잡지 <계간미술> 여름호에 게재된 기획기사 ‘작가들을 재평가한다’는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장안의 화제가 될 만했다. 12명의 미술평론가들이 각각 ‘과대평가된 작가’ ‘과소평가 받은 작가’를 꼽은 설문을 정리한 기사였기 때문이다. 평론가들이 ‘과대평가됐다고 꼽은 작가’는 조선시대 마지막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 화가였던 김은호와 황소 그림으로 유명한 이중섭이었으니 얼마나 스캔들을 일으켰겠는가. 반면 ‘역량에 비해 과소평가 받은 작가’ 명단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함께 잊힌 이름 하나가 있었다. 바로 통영의 화가, 전혁림(1915~2010)이었다.

“잊혀져 있어 그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인 전혁림. 전혁림이란 작가야말로 방금 인구마다에 회자되어지고 있는, 죽은 그 누구 열 사람과도 바꿀 수 없는 현존해 활동하고 있는 작가다. 화단 상황 밖의 아웃사이더이고 당당한 유화 제작에 골몰하면서도 대인관계에 있어서 적이 엑센트릭(eccentric, 괴짜 같은)해서 범상인들에게 이해되기 어려운 존재다. 전혁림의 예술은 전혁림의 신변잡기적, 서정적인 얼굴을 추호도 내밀지 않는다. 이 불확실 시대에 그는 가장 확실한 존재인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작가들을 재평가한다’, <계간미술>, 1979년 10호. 100페이지)

이 기사가 나간 뒤 이어진 미술계의 환대는 기적과 같았다. 마치 그동안 전혁림의 존재와 예술세계를 완벽하게 잊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사과하는 것처럼 1980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의 각종 전시에 전혁림의 작품을 초대한 것이다. 그럴 법도 했다. 그동안 전혁림의 주 활동무대는 통영과 부산이었다. 그러다 보니 중앙화단과 교류가 끊어졌고 서울 중심의 미술계는 어처구니없게도 전혁림을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로까지 분류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미 65세였던 노화가의 소식이 오랫동안 들려오지 않았으니, 귀천했다고 쉽게 생각했을 것이다.

일단 길이 트이게 되자 ‘원로화가’ 전혁림의 행보는 거침이 없어졌다. 샘터화랑·신세계미술관·호암갤러리·조선일보·동아일보 미술관 등 서울에서 전시가 줄줄이 이어졌다. 마침내 예화랑에서 열린 오지호·유영국·윤중식·권옥연과의 5인 초대전에서 전혁림은 처음으로 제대로 그림을 팔았다. 춘추화랑에서는 소품 30점으로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그림을 팔게 됨에 따라 전혁림은 처음으로 남의집살이를 끝내고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생활이 안정되자, 전혁림의 예술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로 깊이 천착해 갈 수 있게 됐고 마침내 2002년엔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그의 나이 88세였다.

미술계 아웃사이더, 이전투구하는 제도권 미술과 연을 끊다

1915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난 전혁림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스물한 살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대다수 미술 하는 사람들이 일본 유학이나 명문학교에 가서 공부하던 시류와는 전혀 다르게, 독특하게도 그는 순전히 독학으로 미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예술과는 전혀 상관없는 학교인 통영수산전문학교를 다니면서 아마추어 화가인 일본인 교사 가와시마 도시야스(樺島年安)에게 미술을 배운 것을 시작으로, 졸업 후 은행에서 일하면서 일본인 화가들이 개최한 단기 미술강습회에서 그림의 기초를 배운 것이 다였다. 이렇듯 미술계 인맥 중심축의 하나인 학계와 연이 전혀 닿지 않았으니, 그가 ‘아웃사이더’였던 건 어쩌면 당연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가방끈이 짧으면 어떠랴. 전혁림에게는 무기가 있었다. 분출하는 재능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지 않아 그는 부산미술전(1938년)에 <신화적 해변> <월광> 등을 출품해 입선, 성공적으로 화단에 데뷔하게 된다.

데뷔 후 전혁림은 한동안 중앙화단에서도 열심히 활동했다. 그는 1949년 열린 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 <정물>을 출품해 입선했는데 이때 대통령상을 놓고 유경채와 겨뤘다는 뒷얘기가 전해질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는 화가였다. 그러다 1953년 열린 2회 국전에 전혁림은 당시로선 대단히 신선했던 반추상화 <늪>을 출품하게 된다. <늪>은 특선에 올라 문교부 장관상까지 타게 됐고, 이로써 전혁림은 서양화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이 작품은 국전 사상 최초의 비구상(구체적인 대상의 재현을 거부한 미술) 계열 작품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후 전혁림은 국전에서 1955년 <화조월> 입선과 1961년 <회화>(순수추상표현) 특선, 1962년 <작품>(추상표현) 무감사 입선 등의 활약을 했으나 그 뒤로 그는 스스로 국전을 외면해 버렸다. 서울대파와 홍익대파가 국전 심사위원 자리를 다투고 각자 자기 제자들의 작품을 뽑는 등 학연과 지연으로 국전이 운영되고 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국전’이라는 제도권 미술과의 절연은 재야작가의 길로 가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결국 전혁림은 63세 때인 1977년 ‘작품도 정리하고, 인생을 정리하려고’ 부산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통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세간의 평가와 상관없이 자기 예술을 위한 외길을 묵묵히 걸었다. 오히려 중앙화단과 연을 끊자 국제무대에서 새로 부각된 양식을 흡수하는 데 급급하거나 유행에 따르는 기류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 천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전혁림은 평생 통영 주변을 맴돌며 통영 바다를 ‘코발트 블루’ 화폭에 담으며 살았다. 시인 정수자가 전혁림의 그림을 보고 "통영이 시푸르게 걸어 나오는 듯하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전혁림으로 말미암아 통영과 코발트 블루는 거의 동의어가 됐다.

'구십, 아직은 젊다' 노화가의 진짜 전성기

그런 와중에 1979년 여름이 됐다. 그는 순식간에 ‘과소평가 받는 작가’가 돼 단번에 화단의 화제인물로 떠올랐다. 환갑이 훨씬 지난 65세 노화가의 진짜 전성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가치가 재조명된 것에 보답하려는 열정인지 몰라도, 동년배 작가들이 ‘회고전’을 열거나 화업에서 손을 떼던 때에도 그는 ‘현역작가’로서 끝없이 창작력을 불태웠다. 자타공인 ‘통영의 활화산’. 그것이 바로 전혁림이었다. 그래서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신작(新作)전을 열었던 것일 테다. 그것도 1천호가 넘는 대작(大作)을 선보이는 전시회를 그는 2005년 경기도 용인 이영미술관에서 개최한다. 전시타이틀은 다름 아닌 ‘구십, 아직은 젊다’였다. 구십이 젊다니, 글 자체는 역설적이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제목이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의 본분을 게을리하지 않으니 오히려 전혁림의 그림은 나날이 젊어진다는 것이 당시 화단의 평가였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 전혁림은 당시 전시회를 앞두고 다음과 같은 말로 노익장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눈만 뜨면 그림을 그리고 머릿속은 늘 새로운 생각들로 출렁거리고 아이디어가 용솟음칩니다. 시력도 까딱 없고 손놀림도 힘찹니다. 하늘이 내게 준 복이지요. 예전보다 더욱 왕성하게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전혁림은 2010년 작고했지만 4년이 지난 후인 2014년 그는 드디어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한 ‘한국 근현대 명화 100선 작가’ 중 한 명으로 뽑히게 됐다. 중앙화단에서의 화려한 인맥과 명성을 쌓는 걸 뒤로하고, 고집스레 고향에서 제작에만 전념한 세월. 전혁림은 그 세월이 진정 옳았음을 성공적으로 입증해 낸 셈이다.

<화가의 마지막 그림> 저자 (sempre80@naver.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