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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전쟁의 땅 베트남을 가다-상] 베트남전쟁 상흔 찾는 길에서 만난 비극의 역사 ‘한국군 학살’
▲ 빈호아 학살에서 살아남은 도안 응히아씨가 위령탑 앞에 앉아 있다. 그는 당시 생후 6개월이었다.<연윤정 기자>

한국과 베트남은 희비가 교차하는 ‘운명의 상대’이자 ‘아픈 손가락’이다. 두 나라는 식민지에서 해방된 뒤 분단체제가 들어선 아픈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한국은 베트남과 1992년 수교했다. 지금은 베트남 투자 1위 국가가 한국이다. 얼마 전에는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대표팀이 동남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스즈키컵)에서 우승했다.
하지만 두 나라 사이에는 풀지 못한 구원이 있다. 한국은 베트남전쟁 때 미군 다음으로 많은 전투병력을 파병했다.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증언이 잇따르는 배경이다.
인천지역 시민단체인 노동희망발전소(이사장 이성재)가 지난 3~9일 5박7일 일정으로 베트남 중남부기행을 했다. 한국군 학살지를 포함한 기행 여정에 <매일노동뉴스>가 동행했다. 분단과 전쟁의 상흔을 찾는 길에서 사죄와 용서, 화해를 꿈꿔 본다. 상·하편으로 나눠 싣는다.<편집자>



“떠나 줬으면 좋겠다. 잘못하면 큰 문제가 생긴다.”

지난 4일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 학살지 첫 방문지인 빈호아에서 답사단이 맞딱뜨린 현실이다.

중부지역은 베트남을 나누는 북위 17도 선이 지나가는 곳으로, 베트남전쟁 때 한국군이 주둔했던 지역이다. 학살지가 집중돼 있다. 답사단이 찾은 곳은 한국군 학살지인 빈호아와 퐁니·퐁넛, 하미마을 3곳과 미군 학살지인 미라이다.

학살지 집중된 베트남 중부지역

답사단은 3일 중부지역 대표 해안도시 다낭으로 입국한 뒤 남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호이안으로 이동했다. 호이안은 16세기 중반 이후 인도·포르투갈·프랑스·중국·일본 등 여러 나라의 상선이 기항한 무역도시였다고 한다.

호이안은 최근 ‘뜨는 도시’ 중 하나다. 옛날 가옥과 거리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밤이 되면 풍등이 구시가지 전체를 물들인다. 호이안 구시가지는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될 정도로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그러나 베트남전쟁 당시에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이다. 호이안 주변 농촌마을에서도 참혹한 학살이 자행됐다고 한다.

한국군 학살지인 빈호아에 세워진 위령비. 희생자 430명 중 422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연윤정 기자>

이번 답사단에는 자동차·플랜트·택시 등 인천지역 노동자와 지역 활동가 15명이 함께했다. 응우옌 비엣(72) 선생이 답사단 가이드를 맡았다. 비엣 선생은 베트남전쟁 당시 북한에 유학한 공학도 출신이다. 그때 한국어를 배운 게 나중에 한국과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답사단은 4일 빈호아로 이동했다. 빈호아는 가장 규모가 큰 한국군 학살지로 꼽힌다. 호이안에서 2시간여를 달려 빈호아에 도착했다. 관광지가 아니라서 그런지 베트남인 버스기사가 물어물어 간신히 찾아갔다.

“하늘까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빈호아에 세워진 한국군 증오비에 새겨진 문구다. 이날 오전 마을 입구에 도착한 답사단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위령비를 찾아 참배했다. 위령비에는 학살당한 마을 사람 422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한국인 청룡부대는 1966년 12월3일부터 6일까지 빈호아 민간인 430명을 학살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위령비에는 8명의 명단이 빠져 있다.

430명 희생된 빈호아에서 쫓겨나다

빈호아에서 학살당한 사람은 대부분 여성과 노인, 어린이였다. 임신부도 있다. 한국군은 빈호아로 행군하면서 민간인 36명을 구덩이에 몰아넣은 후 총으로 쏴 죽였다. 다음날에는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273명을 모아 놓은 뒤 각종 무기로 학살했다. 14명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생존자 중 한 명이 답사단을 맞았다. 도안 응히아(52)씨는 그때 생후 6개월이었다.

“한국군 학살에서 어머니가 저를 안고 고꾸라지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어머니 밑에 있어서 살 수 있었죠. 그때 진흙이 눈에 들어가서 지금 앞을 보지 못합니다.”

도안 응히아씨에 따르면 가끔 한국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온다고 한다. 답사단 일행처럼 베트남전쟁에서 벌어진 비극에 대해 사죄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미라이 학살 박물관에 조성된 희생자 명단을 새긴 대리석. 504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연윤정 기자>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흰옷 입은 젊은 남자가 비엣 선생을 찾아와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비엣 선생은 답사단에게 안타까운 소식을 알렸다.

젊은 남자는 동네를 담당하는 경찰이었다. 비엣 선생은 “답사단이 계속 마을에 있으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한다”며 “떠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답사단은 위령비에서 조금 떨어진 한국군 증오비로 이동하려는 것을 포기하고 버스에 올랐다. 답사단은 20분 만에 빈호아 마을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답사단이 찾아간 날은 4일. 52년 전 학살당한 희생자 기일이었다. 우리 스스로 무신경했던 건 아닐까 만감이 교차했다. 도안 응히아씨는 떠나는 답사단에게 “찾아 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건강하시길 바란다”는 인사를 건넸다.

미군에 의해 희생된 미라이 사람들을 형상화한 위령탑.<연윤정 기자>

‘더러운 전쟁’ 미라이 학살지 찾다

다음 방문지는 그 유명한 미라이 학살지다. 미군은 68년 3월16일 민족해방전선(베트콩)에 대한 보복을 자행했다. 올해로 50주년이 된다. 답사단은 같은날 오후 미라이박물관에 도착했다. 이 지역은 베트남에서는 손미(Son My) 지역으로 불린다. 구정대공세에서 손미 지역이 남베트남 베트콩 수중으로 떨어지자 미군은 탈환작전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504명이 학살당했다. 찰리 중대는 윗선으로부터 “싹 쓸어 버려라”는 명령을 받고, 미라이로 진입해 가옥을 차례차례 수색하며 마을 사람들을 한곳에 몰아넣은 후 자동화기로 학살했다.

일부 민간인이 살 수 있었던 것은 헬리콥터 조종사 휴 톰슨 준위와 그의 동료들 덕분이었다. 톰슨 준위는 작전지역을 비행하다가 민간인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보고 착륙해 여성과 아이들을 구했다. 학살자들의 반발에 부닥쳤으나 “발포시 응사하겠다”는 담대함을 보였다.

미군의 미라이 학살지에 세워진 박물관과 위령탑이 조성돼 있다.<연윤정 기자>

해당 사건은 은폐돼 적군을 사살한 군사작전으로만 보고됐다가, 프리랜서 기자 시모어 허시의 특종기사와 군 사진사였던 로널드 해벌이 찍어 감춰 뒀던 사진이 1년 뒤 보도되면서 참극이 세상에 드러났다. "더러운 전쟁." 반전여론이 들끓었다. 미군 가담자가 26명이나 됐지만 윌리엄 켈리 중위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런 내용은 미라이박물관에 고스란히 전시돼 있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희생자 명단을 새긴 기념비가 눈에 들어온다. 504명의 이름과 나이가 적여 있는데, 1살 갓난아이를 포함해 너무 많은 아이들이 희생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은 사람과 피만 남았다”

박물관 전시실로 들어가면 미라이 학살 때 사진을 볼 수 있다. 너무 잔인하고 끔찍해서 정면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다. 나무 앞에 선 여성과 아이들. 죽음을 앞둔 그들의 눈에 두려움이 드리워져 있다.

답사단이 미라이 학살 위령탑에서 참배하고 있다.<연윤정 기자>

미군을 담은 사진이 눈길을 끈다. 대량학살 직후 미군의 눈에서는 시퍼런 광기가 비쳤다. 흑백사진인데도 시퍼렇게 보였다.

생존자들의 모습도 보인다. 11살 소년의 앳된 얼굴. 멍한 표정을 한 소년의 이름은 팜 탄 콩. 고아가 된 소년은 고향을 떠나 살다가 학교를 졸업하고 이곳으로 돌아왔다. 1992년부터 박물관 직원으로 일하다가 관장까지 역임했다. 지난해 정년퇴직했다고 한다. 팜 탄 콩(61) 전 관장이 답사단을 맞았다. 그는 “미군은 4시간 동안 504명을 죽였다”며 “죽은 사람과 피만 남았다”고 회상했다.<상자기사 참조>

미군에 의해 학살당하기 직전 여성과 아이들을 찍은 사진.<연윤정 기자>

박물관은 75년 7월부터 짓기 시작해 이듬해 2월 완성됐다. 75년이면 전쟁이 끝난 해다. 아무것도 없던 시기였는데도 베트남은 8개월 만에 박물관을 지었다. 미군 학살을 기록하고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베트남과 미국은 95년 국교가 정상화됐다. 현재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 사람들이 미라이 학살지를 찾는다. 팜 탄 콩 전 관장은 “전쟁은 죄악”이라며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답사단은 박물관에서 나와 위령탑을 참배했다. 위령탑은 희생된 어린 자녀를 안은 어머니가 주먹을 불끈 쥔 오른쪽 팔을 들어 올리는 형상의 조각품이다. 어머니의 얼굴 표정은 한없는 슬픔으로 가득 차 보였다.

미라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팜 탄 콩씨는 나중에 미라이 학살 박물관장을 역임했다.<연윤정 기자>

[상자 인터뷰] 미라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소년, 팜 탄 콩 전 박물관장
“전쟁은 죄악, 미래 세대에 전쟁 없는 평화 알리겠다”

“우리 마을은 아주 조용한 농촌마을이었습니다. 그날 새벽 갑자기 미군이 쳐들어왔죠. 논에서 일하던 사람을 죽였고, 집집마다 들어가 사람들을 끌어내 죽였습니다.”

지난 4일 오후 미라이박물관에서 답사단을 맞은 팜 탄 콩(61·사진) 전 관장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시 그의 집에는 어머니와 5명의 형제가 있었다.

“미군 3명이 집에 들어왔어요. 우리는 집 안 땅굴에 숨었죠. 제가 제일 처음 들어갔고, 어머니는 동생을 업고 마지막에 들어갔지요. 그런데 미군이 땅굴에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나중에 마을사람이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땅굴을 팠다가 홀로 살아남은 그를 발견했다.

“제가 여기 온 건 여러분과 아픔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희생자 안식을 위해 올해 3월 박물관에 사당을 조성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국처럼 유교문화권인 베트남은 조상에 대한 제사를 중시한다.

"미국이 사과했냐고요? 아니요. 하지만 미국사람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한 번은 미군 출신 7명이 찾아와 과거 참전군인이 한 짓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답사단이 한국군 학살에 관해 묻자 팜 탄 콩 전 관장은 “한국군은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였다”며 “미라이 학살처럼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흔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미라이 학살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명백한 증인과 사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미국과 한국에 사과를 요구할 생각이 있을까. 팜 탄 콩 전 관장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는 “미국에 사과나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며 “자발적으로 베트남 회복을 위해 돕겠다면 모르겠지만 우리가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국내외 사람과 미래 세대에게 전쟁은 죄악임을 알려 주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가 지켜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라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소년 팜 탄 콩. 당시 11살이었다.<연윤정 기자>

연윤정  yjyon@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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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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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진 2018-12-27 23:01:09

    사전에 인민위원회와 연락하여 허락을 받았어야 할 터, 무작정 찾아가면 큰일나죠, 한국식으로 생각하고 찾아가면 그런 일이 허다하죠,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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