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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하는 계급들의 공멸
▲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항상 서로 대립하면서 때로는 숨겨진, 때로는 공공연한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각각의 싸움은 그때마다 사회 전체의 혁명적 재구성 또는 투쟁하는 계급들의 공멸로 끝났다.”

누군가 오늘날 정세를 묻는다면, 최근 나는 마르크스의 이 문장을 주저 없이 인용한다. 최근 한국 정세를 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현 상황은 물론 ‘혁명적 재구성’이 아니라 투쟁하는 계급들(자본과 노동)의 ‘공멸’이다.

이런 상황은 문재인 정부에게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다. “노동 존중”을 앞세운 문재인 정부가 “자본 존중”을 내건 이전 정부들과 비슷한 몰락의 길을 밟고 있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문재인 정부는 타락한 보수정부를 끌어내리고, 경제·사회 모든 분야에 개혁과제를 제시했었다. 소위 진보개혁진영의 의제 상당수가 정부과제에 반영됐다. 하지만 집권 3년차를 앞둔 지금, 그 결과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소득주도 성장론만 봐도 단지 실행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 자체가 틀렸다는 문제제기가 많다. 수요측 문제를 해결하려 하니 공급측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공급측 문제를 해결하려 하나 마땅한 대책이 없는 상황이 2년 내내 반복되는 중이다. 문재인 정부가 자본과 노동의 공멸을 만든 주범은 아니겠으나 ‘촛불’을 통한 사회의 재구성이 문재인 정부를 통해 실패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자본가 또는 현대적 자본가라 할 기업의 계급투쟁은 이윤율의 경제로 그 결과가 표현된다. 투자한 자본에 비해 얼마나 많은 이윤을 뽑아내느냐(이윤율)가 자본가의 유일무이한 목표다. 이윤율을 높이려면 기술혁신으로 자본의 생산성을 높이든, 임금을 줄여 이윤분배율을 높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자본가들은 그 어떤 것에도 성공적이지 못하다. 가동률 저하, 중국의 추격, 신기술 개발의 어려움 등으로 자본생산성이 하락하는 가운데 (노동자 입장에서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자본은 노동을 압박해 이윤분배율을 높이는 데도 그다지 성공하고 있지 못하다. 그야말로 자본가의 총체적 무능이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무능은 노동의 축복이 아니다. 무능한 자본가로 경영위기가 발생하면 노동자들은 고용위기를 겪는다. 노동자에게 무서운 위협은 유능하고 탄압하는 자본가보다 무능하게 망하는 자본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노동자계급은 자본의 무능을 대체할 유능함을 보여 주고 있을까? 오늘날 노동자운동은 그런 상황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단적으로 노동자운동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거의 모든 사안을 정부에 해결해 달라며 청원 중이다. 최저임금, 비정규직 정규직화, 산업재해, 노조탄압, 정리해고 등등 제도적 문제만이 아니라 이제 단위사업장 문제까지 모조리 문재인 대통령을 찾는다. 민주노총 위원장은 당선과 함께 대통령 면담을 요청하고, 대통령 일정 중에 잠깐 만나 노동현안을 해결해 달라고 부탁한다. “만납시다. 문재인 대통령”이 투쟁구호로 사용되는 시대다. 정부를 총자본의 대리인으로 규정하고 투쟁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개혁적 제도를 설계해 정부에게 실행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노동자운동은 사회변화의 대안세력이 되지 못하고 있다.

개혁을 표방한 정부의 실패, 위기에 대처하는 자본가의 무능, 대안이 되지 못한 채 호소만 반복하는 노동자운동.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투쟁하는 계급들의 공멸”이다.

계급들의 공멸 뒤에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보통 극단적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은 사회변화에 관한 과학적 비전이나 역사적 맥락보다 기득권에 대한 악무한적 비난, 영웅적 정치인, 대중의 정념 등에 근거한 정치를 의미한다. 1930년대 독일에서는 바이마르 정부의 몰락, 공황에 대처하는 자본의 무능, 노동운동의 지리멸렬이 이어지다 히틀러가 반유대주의와 전체주의를 앞장세워 대중을 조직했다. 2010년대에는 미국에서 민주·공화 정치인의 부패, 일자리 문제나 빈부격차 문제를 해결 못하는 자본의 무능, 민주당 지지밖에 하지 못하는 노동운동의 한계 속에서 인종주의와 무역전쟁을 공약으로 내건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유럽에서 발흥하는 인종주의 극우정당들도 이런 현상과 일맥상통한다. 일각에서는 포퓰리즘 시대가 좌파의 대중적 세력화 기회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사회변화의 과학적 대안을 갖추지 못한 좌파는 결국 우울한 미래로 가는 급행열차에 불과하다. 좌파 포퓰리즘 사례로 인용되는 베네수엘라나 그리스의 현재를 보면 이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현재 같은 상황이 이어지면 우리나라도 결국 이런 비극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18년의 칼럼을 우울한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대안도 없이 이런 비판만 늘어놓는다고 뭐가 달라지냐고 타박할 독자도 있겠다. 하지만 오늘날의 정세를 비극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오만 가지 대안을 이야기한들 터무니없는 망상으로 들릴 것이다. 노동자운동을 하는 우리가 우선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정세적 ‘비극’ 그 자체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한지원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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