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해 준다고 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서 더 절망스럽습니다. 차라리 정규직 전환 정책이 없었더라면 예전처럼 고용승계라도 됐을 텐데요.”

문재인 정부가 지난해 7월부터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정규직 전환은커녕 계약만료 통보를 받으며 직장을 잃게 될 처지에 놓인 비정규 노동자가 적지 않다. 한국도로공사 교통방송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 30명도 그렇다. 공사 교통방송은 전국에 설치된 4천500여개 CCTV 등으로 교통정보를 수집해서 분석한 뒤 공사 스튜디오에서 방송을 제작해 방송사에 송출한다. 노동자들은 제작과 송출 실무를 한다. 이들 교통캐스터와 연출·기술직 노동자들은 TV와 라디오·인터넷에서 교통상황이나 사고속보 같은 교통정보를 알리는 역할을 한다. 노동자들은 “정부의 정규직 전환 정책이 되레 도로공사 교통방송 비정규직을 길거리로 내모는 상황이 됐다”고 하소연했다.

노동부 “정규직 전환 우선협의” 권고

25일 공공산업희망노조 한국도로공사교통방송지부(지부장 안홍규)에 따르면 내년 1월1일부터 도로공사는 교통방송 운영을 기존 ㅎ사에서 ㄷ사로 바꾼다. ㅎ사는 이달 말 도로공사와 계약이 만료된다. 그런데 새로 업무를 위탁받은 ㄷ사는 기존 용역노동자들의 고용을 승계하지 않고 공개채용하겠다고 밝혔다. ㄷ사는 최근 필기시험과 면접을 비롯한 채용절차를 진행하고 합격자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

문제는 용역노동자들이 고용승계 대상일 뿐 아니라 정규직 전환 대상자라는 점이다. 노동자들은 용역업체가 1년 또는 2년마다 바뀌어도 정부 용역근로자 근로조건 보호지침에 따라 대부분 고용이 승계됐다. 지부는 “길게는 13년 동안 일한 직원도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분류한 정규직 전환 대상에도 포함됐다. 고용노동부는 9월 “교통방송 용역노동자를 정부 비정규직 제로 정책의 3단계 정규직 전환 대상으로 분류하고, 향후 (구체적인) 정부 민간위탁 가이드라인 확정시 우선적으로 전환 여부를 협의하라”는 취지의 권고안을 냈다. 노동부는 “최대 6개월 이내로 연장계약을 체결하고 정규직 전환 협의 예정 근로자의 고용승계가 보장될 수 있도록 입찰조건·용역계약 조건에 포함하도록 한다”고 덧붙였다.

근로자지위확인 소송 부담됐나

지부는 ㄷ사가 고용을 승계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용역노동자들이 법원에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낸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용역노동자들은 올해 10월 “소속만 용역이지 도로공사 건물 안에서 공사의 방송장비로 상시·지속업무를 했다”며 “용역업체는 중간수수료만 가져갈 뿐 실질적 지휘·감독은 공사가 하는 등 불법파견 소지가 있다”며 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안홍규 지부장은 “공사가 새 업체와 계약하면서 과업지시서에 고용승계와 관련한 문구를 넣지 않았는데 근로자지위확인 소송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며 “공사가 과업지시서에 명시하지 않다 보니 ㄷ사도 눈치를 보게 되고, 또 올해 10월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한 것도 부담을 느껴 고용승계를 안 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용역노동자들은 ㄷ사 공개채용에 응하지 않았다. 안홍규 지부장은 “경력직에 합당한 시험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 지원서만 제출하고 아무도 필기시험에 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ㄷ사 관계자는 “회사 내규에 따르면 고용승계를 할 때 절차상 필기시험과 면접을 봐야 한다”며 “필기시험만 합격하면 경력자는 우대하겠다고 했고, 시험시간도 조율해 줬는데도 기존 노동자 중 아무도 필기시험을 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공사 관계자는 “현재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이 들어와 있어서 공사가 ㄷ사에 고용승계나 계약연장을 강제하기에는 민감한 부분이 있다”며 “이달 말 정부가 3단계 전환 대상자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내려보낼 것으로 알고 있어서 그때까지는 상황을 지켜보려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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